John Lennox의 2012 베리타스 포럼 강연: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비이성적인가?’

johnlennox

옥스포드 대학의 수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존 레녹스 (John Lennox)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지성인 중 하나이다. 그는 박사 학위만 3개를 취득했고 그 중에 하나는 옥스포드 대학, 또 하나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취득했다. 또한 언어에도 탁월한 소질이 있어 4-5개정도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가히 천재라 불릴만한 인물이다. 그는 옥스포드에서 학부생으로 수학하던 시절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CS Lewis의 마지막 강의를 들었던 학생 중 한명이며, 그 자신도 현재 스티븐 호킹 (Stephen Hawking) 이나 피터 싱어 (Peter Singer) ,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와 같은 쟁쟁한 무신론자들에게 빈틈없는 논리로 기독교를 변호하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가이다.

필자도 2011년 캘리포니아 남가주대학 (USC) 캠퍼스에서 ‘Same evidence, different conclusions: Is “objective belief” an oxymoron?’ 이라는 주제로 있었던 베리타스 포럼 강연과 2014년 갈보리 채플 (Calvary Chapel) 에서 있었던 존 레녹스의 강연을 직접 들은 경험이 있다. 1945년생인 그는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며 언제나 위트가 넘쳐나는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는 힘이있는 인물이였음을 생생히 기억한다.

2012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비이성적인가? (‘Is belief in the supernatural irrational?’) 라는 주제로 베리타스 포럼이 주최하여 강연을 했다. 초자연 (supernatural)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시작으로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펼쳐나간다. 그는 또한 오늘날 저돌적인 신무신론자 (new atheists)들이 왜곡한 기독교의 입장들을 하나 하나 짚어가면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했고,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레녹스의 하버드 대학 강연의 중요한 포인트 몇가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이성적인 과학 vs 비이성적인 종교?

수 많은 과격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등에 업고 종교는 과학에 무지하고 객관적인 증거와 논리를 따질 줄 모르는 비이성적인 사람들만 믿는 체계라는 식으로 논쟁을 끌고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레녹스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훌륭한 과학자들을 언급하면서 이 논쟁은 종교 vs. 과학의 구도가 아니라 자연주의 (Naturalism) vs. 유신론 (Theism)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오히려 그는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맥스웰과 같은 현대과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위대한 과학자들이 신실한 신앙인이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며 역사적으로 유신론이야 말로 현대과학을 가능케 했던 사고체계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유신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그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하고 설명할 수 있는 질서정연한 법칙을 신이 자연세계에 부여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현대과학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레녹스는 더 나아가서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이 진리의 추구에 있어서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레녹스가 설명하는 논증이 소위 말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인  앨빈 플란팅가 (Alvin Plantinga)가 주창한 Evolutionary Argument Against Naturalism (EAAN) 이다. 이 논증은 사실 CS Lewis가 자신의 책 <기적>에서 이미 다룬 내용을 플란팅가가 좀 더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킨 것인데 계속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마음이 가장 하등한 동물에서 발전돼 나온 것이라면 그 마음에서 나온 대단한 결론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던 다윈에게 까지 올라가게 된다. 레녹스의 핵심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말하는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은 살아남기위해 생존에 가장 적합하게 진화하는 것이지 진리를 가장 잘 포착하는 형태로 진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 생물학의 큰 기둥인 신다윈주의 진화론은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매우 불편한 관계 또는 양립 불가능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플랜팅가의 EAAN 논증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이곳을 참조.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자들은 우주가 닫힌 체계 (closed-system)라고 말하며, 우주의 모든 것이 물리,화학적인 작용들로 환원된다고 설명하기 때문에, 모든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이론들과 수학공식들같은 비물리적인 것들 조차도 물리, 화학적인 작용들의 결과라고 주장해야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는 점을 레녹스는 잊지않고 강조한다.

자연세계는 닫힌 체계 (closed system)인가?

무신론자들은 종종 자연세계는 닫힌 체계이고, 자연은 이미 밝혀진 자연법칙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기때문에 기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이나,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사건같은 성경에 기록된 여러 기적들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레녹스는 매우 위트있게 설명해버린다. 금고에 1000불을 어제 한번, 또 오늘 한번 넣어놓고 내일 금고를 열었을 때 500불만 들어있다면 그것은 사칙연산법칙이 깨져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금고를 열고 훔쳐간 것임이 분명한 것과 같이, 우주안에서 부활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자연법칙이 깨진 것이 아니라, 우주를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우주밖에서 이러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조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 강연에서 가장 위트있는 비유가 아니였나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주장을 할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법칙을 무너뜨리는 어떤 다른 자연적인 방법으로 부활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밖에서 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조정했다는 레녹스의 설명은 기적에 대한 많은 오해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설명인 듯 하다.

과학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20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철학자였던 버트란트 러셀 (Bertrand Russell)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과학이 알려줄 수 없는 것은 인류가 알 수 없다’. 과학만이 지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러셀은 자신이 한 이 주장이 과학적 주장이 아님을 생각하지 못했고, 망신살 뻗칠만한 논리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러셀보다는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답할 수 없는 과학의 한계를 인식해야한다’고 말한 노벨상 수상자 피터 메다와 (Sir Peter Medawar) 의 말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일 것이다.

매케니즘과 에이전트

레녹스가 강조하는 내용 중에 또 하나는 메케니즘과 에이전트는 다르며 각각 별개의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포드 자동차를 설명하기 위해선 엔진의 작동원리와 같은 메케니즘을 다루는 설명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이 메커니즘을 설계한 헨리포드라는 사람을 설명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말은 결국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여 예전에는 설명될 수 없었던 자연현상들 (메케니즘)이 설명가능하게 되어진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그 자연현상들을 설계했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 (에이전트)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레녹스가 2008 년에 옥스포드 대학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리처드 도킨스와 벌였던 논쟁에서도 줄기차게 설명했던 부분이다.

Contact (1997)

1425759_10101950904638294_2139138494_n

1997년에 개봉했던 Contact 이라는 영화를 오늘에서야 봤다. 15년 이상 지난 영화이지만 오늘날 더욱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많은 것을 시사하는 영화다.

몇가지 포인트:

1. 고통의 문제
고통은 민감한 문제다. 예나 지금이나 고통의 문제만큼 인간의 영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제는 없을 것이다. 주인공 엘리로 등장하는 조디 포스터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심근경색으로 잃게된다.  그녀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를 위로해주기 위하여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거네며 다가온 한 성직자에게 던지는 그녀의 회의적인 말투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반영한 것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아픔이 그녀에게 무신론적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무신론자들이 National Academy of Science의 멤버의 95% 이상이 무신론자이니 하는 통계를 들이대며 과학적 이해와 통찰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필연적으로 무신론적 세계관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논증을 하곤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연구를 보면, 자신을 무신론자로 분류하는 이런 탁월한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과학적 연구로 인해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미 견고한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들의 과학적 연구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한다.

2. 과학과 초자연적인 경험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지침중에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이라는 것이 있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더 간단명료한 쪽을 선택해야한다는 것이 오컴의 면도날의 원리이다. 즉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신론자이자 탁월한 과학자로 나오는 엘리는 이 영화에서 Occam’s Razor를 들이대며 신이 존재하지만 인류에게 자신의 흔적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설명과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인류가 만들어 냈다는 설명 중 어느 것이 더 간단한 설명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관찰가능한 증거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과학자인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신의 존재를 가르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영상참조).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위해선 (과학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는 엘리에 대한 팔머(Matthew McConaughey) 의 반응이 인상깊다:

—————————————————————————
팔머: Did you love your father? 아버지를 사랑했나요?
엘리: Yes. Very much. 네. 아주 많이요.
팔머: Prove it. 증명해봐요.
—————————————————————————

팔머의 전략은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 윌리엄 레인 크레그(William Lane Craig)가 과학만이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순진한 사상을 옹호하는 옥스포드의 화학자 피터 앳킨스 (Peter Atkins)에게 과학이 증명할 수 없는 최소 다섯가지를 제시하며 그를 벙찌게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상참조)

1. Logical and mathematical truths (논리와 수학적 진리)
2. Metaphysical truths (형이상학적 진리)
3. Ethical values (가치에 관한 진술)
4. Aesthetic judgments (미학적인 판단)
5. Science itself (과학 그 자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법정에 앉아 자신이 들이댔던 Occam’s Razor의 논리로 공격받는 상황이 온다. 실재였던 경험들에 대한 그녀의 진술들이 과학적인 증거의 부재로 반박당하게 되고, 그녀가 일종의 일시적인 환상에 빠져있었다는 설명이 더 Occam’s Razor의 원리에 더 충실하기에 더 설득력이 있다는 말까지 나온게된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이 겪은 경험들을 증명할 수 있는 물리적인 증거를 하나도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과 자신의 모든 경험들이 일종의 환각 상태에서 일어났을 가능성, 자신도 다른 누군가가 그런 주장들을 했다면 똑같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내렸을 것이라는 점 등을 모두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이 실재였다는 사실에 조금도 의심이 없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만이 보고 들은 것들과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변론한다 (영상참조)

이 장면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앞에서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전 우주를 주관하시는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나누어 본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공감할만 한 부분이다. 과학은 절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없다. 과학이라는 학문의 탐구 영역은 물리적 법칙 아래있는 자연세계이지만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즉 그 모든 물리적 법칙들을 뛰어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은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에 의존하는 과학적 탐구방법은 성격상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가 던지는 대사가 있다:

—————————————————————————
“It’s like you are saying science killed God. What if science simply revealed that He never existed in the first place?”

“당신은 과학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말하는 거에요. 만약 과학이 하나님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밝혀낸다면요?”
—————————————————————————
과학이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해낸다는 발상은 사실 과학의 한계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 줄 뿐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만능주의에 빠져 과학이 이런 작업까지도 수행해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3. 도덕적 가치

영화 속에서 엘리는 “Would you consider yourself a spiritual person?” 이라는 질문에 “I consider myself a moral person.”이라는 동문서답을 한다. 이 질문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영혼,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자신은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쌩뚱맞은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상하다.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부재를 전제한다면 엘리는 어떤 기준으로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의 세계관에 의하면 도덕이란 결국 약육강식의 원리 속에서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일련의 사회적 규범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진화론자+무신론자들에게 던지는 핵폭탄: 진화론과 무신론은 합리적으로 양립 불가능.

574970_10101056154709324_341748363_n

엄밀히 이야기 하자면, 이 글에서 소개할 알빈 플란팅가 (Alvin Plantinga) 교수의 주장은 “진화론과 자연주의(Naturalism)는 양립 불가능하다” 이다. 자연주의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들을 위해 일단 “무신론” 이라는 더 보편적인 단어로 낚았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계속 살펴보겠지만 오늘날 무신론 = 자연주의 이라는 공식이 어느 정도는 성립한다고 보기 때문에 아주 몹쓸 사기를 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일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존재나 힘의 개입을 거부하는 입장을 일컫는 자연주의는 극단적인 무신론의 한 형태이다. 이론적으로 모든 자연주의자는 무신론자이여야 하지만 모든 무신론자가 자연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플라톤의 ‘선’ 개념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자연주의자는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오늘날 무신론자들은 거의 대부분 자연주의의 옷을 입고 있다. 특히 물질세계는 물질로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유물론적인 전제 아래 이루어지는 과학적 방법론만이 진리를 탐구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식의 주장과 함께 과학이 초자연적인 존재의 부재를 증명한다는 강한 확신에 찬 무신 진영의 과학자들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진화론을 연구하는 생물학, 신경과학 등의 학문 분야의 최전선에 있는 과학자들은 진화론은 이론 이상을 넘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고, 진화론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무신론으로의 귀결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한다.

과연 그런까? 20세기의 아퀴나스로 평가받으며 기독교 철학의 대부로 알려진 노틀담 대학의 알빈 플란팅가 교수가 과학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던 자연주의자들의 놀이터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그는 오히려 자연주의와 진화론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이며 진화론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공격하는 수많은 자연주의자들을 초토화 시켜버림으로써 종교철학사에 한 획을 긋는 큼지막한 업적을 남긴다. Evolutionary Argument Against Naturalism (EAAN) 으로 불리는 이 논증은 찰스 다윈이 자신의 진화론이 빠져있는 모순에 대한 고민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인간의 마음이 가장 하등한 동물에서 발전돼 나온 것이라면 그 마음에서 나온 대단한 결론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 (다윈 자서전, 1876)

309478_10101056153975794_598031439_n

자연주의자들에게 인간은 그저 유물론적인 해석을 통해서만 설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진화론을 수용하는 자연주의자라면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동들을 신경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작용에 대한 결과이며. 이런 신경체계의 작용은 주변환경 등에 적응을 하면서 생존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게 된다고 믿어야 한다.

문제는 자연주의적인 혹은 유물론적인 접근을 취하는 이상 인간의 신념(Belief)도 행동과 똑같이 신경체계의 화학적 작용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해야한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의 참/거짓 여부는 그들의 생존과 연관이 없다. 그렇다면 자연주의와 진화론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인지 능력이 믿을만하다고 할 수 있는 확률이 낮다. 생존이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인간의 신념이 참을 향해 나가는 방향으로 우리의 인지 능력이 진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인간의 인지능력이 신뢰할 만하다는 전제를 포기해야할 충분한 근거가 생긴다. 이 상황까지 오게 되면, 그들은 결정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얻어진 모든 믿음들 또한 신뢰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자연주의와 진화론이 둘 다 참이라는 믿음또한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결국 자연주의와 진화론은 자기반박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므로 이 두가지는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인간은 진화했으므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라는 식의 주장이야말로 결국 지적자살인 것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을 신뢰할 수 없고, 그 신뢰할 수 없는 인지능력을 통해 얻어진 모든 지식과 믿음을들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은 결국 인간을 허무주의의 늪으로 향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적어도 허무주의의 길에 들어선 진화론+자연주의자는 자신의 사상에 있어서 일관성이 있는 것이리라. 플란팅가는 자연주의와 진화론의 충돌을 이렇게 설명한 후에 더 나아가서 유신론과 진화론은 합리적으로 양립 가능함 또한 설명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부분을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플란팅가는 또한 많은 유신론자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합리성을 보이기 위해 신의 존재 증명에 급급해 하고 있을 때, 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합리성이 신의 존재의 증명을 필요로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신의 존재의 증명이 없이도 신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합리적이라는 논증을 펼쳐 역사에 길이 남을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플란팅가의 논증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아래를 참조:

한글 논문

동영상:

英·美에 기독교 르네상스 바람이 불고 있다 (펌)

545264_10101033040630124_399242648_n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美 크레이그 교수, 英 무신론 학자들과 신학 논쟁

몇 년 전부터 서양에서는 기독교 유신론 철학과 변증의 르네상스적 흐름이 왕성하다. 우리나라에서 번지고 있는 반기독교 운동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다. 미국 탈봇신학대학원 윌리엄 L 크레이그 교수가 지난달 17일부터 26일까지 열흘간 케임브리지대와 옥스퍼드대를 방문해 활동한 영국 신앙투어도 그 한 예다. 크레이그 교수는 ‘합리적 신앙 투어(The Reasonable Faith Tour)’로 이름을 붙인 이번 방문에서 영국 학문의 심장인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를 주제로 영국 석학들과 세 차례의 토론과 네 차례의 공개강연을 진행했다. 논쟁에서 어떤 무신론 학자도 크레이그 교수의 유신론적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이 논쟁 직후 학계에서는 “이번 논쟁은 기독교 신앙이 상당한 지성적 토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며 “영미권에서 기독교 철학과 변증이 활발하게 꽃피고 있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번 투어가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세계 무신론 운동의 대표 격인 옥스퍼드대 석좌교수 리처드 도킨스와의 논쟁 성사 여부였다. 도킨스와 크레이그 교수는 2010년 멕시코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패널 토의자로 만나 짧게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펼쳐질 본격적인 신학 논쟁이 오래 전부터 세계 학계의 커다란 관심사였다. 영국 인문주의연합(TBHA)의 폴리 토인비 회장과의 토론도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도킨스 교수와 토인비 회장은 거듭된 주최측(UCCF)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불참 이유는 크레이그 교수가 철학자로 유명하지 못하다는 것과 바쁘다는 것 등이었다. 도킨스 교수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현존하는 최고의 반기독교 생물학자. 저술활동뿐 아니라 강연, 단체활동 등을 통해 급진적인 무신론 운동을 펼치고 있다.

크레이그 교수는 변증학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로 30권 이상의 철학 관련 서적과 유명 철학 학술지에 200편 이상의 연구논문을 게재한 석학이다. 한국에도 출판된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의 저자인 미국의 유명 비평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와의 논쟁에서 완승을 거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2009년 히친스와의 논쟁 직후 무신론 진영으로부터 “히친스는 두서가 없었고 앞뒤가 맞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히친스를 마치 어리석은 아이처럼 쉽게 다뤘다”는 평가를 얻었다. 무엇보다도 영국 최고의 자존심을 자랑하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그를 초청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명성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도킨스 교수가 ‘철학자로 유명하지 못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수차례의 요청을 거절하자 옥스퍼드대 철학교수이자 무신론자인 다니엘 캐임 박사는 도킨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논쟁에 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캐임 박사의 편지는 “충분한 학문성을 갖춘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와의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도킨스는 겁쟁이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신의 책 ‘만들어진 신’에 대해 토론하자고 하는데도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비웃음거리이자 반지성적인 처사”라는 내용이다.

토론이 위기에 놓이자 크레이그는 도킨스와 토론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계속 밝혔음에도 논쟁은 끝내 무산됐다. 그러자 영국 무신론자 진영에서조차 실망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지난달 22일자 가디언과 크리스천 포스트에서는 ‘도킨스의 논쟁 불참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비판적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크레이그 교수의 신학 토론은 17일 영국 철학저널 ‘Think’의 편집인 스티븐 로, 21일 옥스퍼드대 철학교수 피터 밀리칸, 26일 옥스퍼드대 전 화학교수 피터 애트킨스와 진행됐다.

영미권에서 이처럼 기독교 철학과 변증이 붐을 이루는 것은 2000년 이후부터다. 종전부터 진행돼온 학계의 신학 논쟁에서 유신론자들의 승리가 계속되자 미국의 무신론 철학자 쿠엔틴 스미스는 철학지 ‘필로(Philo)’ 2001년 가을·겨울판에서 “현재 미국 대학 철학과 교수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은 유신론자”라며 “학문세계에서 하나님은 1960년대 후반에 되살아나 현재는 학문적 요새인 철학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글을 발표했다.

탈봇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변증학을 전공한 박명룡 큰나무교회(서울 방화동) 목사는 “미국 학계의 유·무신론 논쟁에서 무신론 학자들이 승리를 거둔 사례는 아직 없다”며 “미국에서 ‘예수는 없다’는 유의 기이한 주장은 오래 전부터 발붙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반기독교적 입장을 취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지식에 근거한 지성적 신앙을 가르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한 개인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견고한 지성적 확신을 갖게 된다면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에 온전히 헌신하게 된다”고 했다.

펌: 기사 원본

“십원짜리” 변증가 – J. Warner Wallace

1424543_10101991471781414_815531326_n

전직 살인사건 전담 형사였던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적용하여 Cold-case Christianity라는 변증서적을 저술한 J. Warner Wallace는 항상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우리에게는 백만불짜리 변증가는 벌써 여럿 있다. 우리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백만불짜리 변증가가 아니라 백만명의 “십원짜리” 변증가 (one-dollar apologist)이다.’ William Lane Craig, Alvin Plantinga,  William Dembski, Gary Habermas 등의 전문적인 학자들이 쌓아올린 학문적 성과들을 배우고 훈련받아 각자의 교회와 학교 일터에서 가르칠 평신도 사역자들이 앞으로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십원짜리” 변증가가 되기 위한 그의 실제적인 조언이 담긴  podcast를 듣게 되었다. (링크: http://pleaseconvinceme.libsyn.com/the-path-to-becoming-a-one-dollar-apologist-podcast)

943001_10101991472869234_1888252263_n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바는 우리 평신도들이 변증사역을 하기 위해서 금전적으로 철저하게 자립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전적인 부담이 없어야 10명도 모이지 않는 작은 그룹이든 수백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이든지 자신의 소명대로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Wallace 자신도 한번도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외부 도네이션을 받은적이 없고 사비로 사역에 들어가는 모든 부분을 다 충당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많은 자료들을 공짜로 제공하고 있고 심지어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나 캠퍼스 사역단체들을 위해 사례비를 받지도 않고 강의를 해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자신의 변증 사역을 밥벌이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될만큼 그가 재정적으로도 준비가 된 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생을 좀 더 길게, 크게 잡고 계획을 해야한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일하는 분야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열심히 일을하고 최대한 많이 저축을 해놓고, 그 돈을 가지고 은퇴한 후 자신이 전념할 사역에 쓰라는 조언이다. 이렇게 타인의 재정적인 도움없이 자신의 사역에 임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해 보인다. 기독교보다 개독교라는 호칭이 더 익숙할만큼 교회의 권위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고, 그리스도인들의 부도덕한 삶 때문에 불신자들 사이에서 복음의 메세지가 점점 더 신빙성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날 특히나 더 이런 태도는 의미가 있다.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 목회자, 선교사, 사역자들이 헌금과 기부금, 책 판매 등으로 부터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모습이 불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에 매우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Wallace는 커리어를 가진 젊은 시절, 자신의 인생의 전반부 동안에는 열심히 자신의 커리어에 종사하면서, 꾸준한 학습과 독서등을 통하여 지식을 쌓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소그룹 훈련등을 인도하며 자신을 준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인생 후반부에 오랜기간 동안 습득한 지식과, 소그룹 사역 경험, 그리고 어느정도의 재정적인 여유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사역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다.

Wallace의 통찰은 참으로 유익한 점이 많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동참하고자하는 열정을 가진 많은 청년들이 목사 아니면 선교사의 길만이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것도 좋지만, 그런 선택이 항상 최선의 방법은 아닐 수도 있고, 오히려 평신도로써 감당해야할 더 큰 사명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조언과 그것을 몸소 실천으로 옮겨 롤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Wallace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 있든지 말든지…”- Apatheism

오늘날 인터넷 상에서는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 데니얼 데닛 (Daniel Dennett), 그리고 최근에 급부상하고 있는 로렌스 크라우스 (Lawrence Krauss) 등으로 대표되는 과학만능주의 (scientism)라는 창을 든 무신론자들과 윌리엄 레인 크레그 (William Lane Craig), 존 레녹스 (John Lennox), 알리스터 맥그래스 (Alister McGrath), 라비 자카라야스 (Ravi Zacharias) 와 같이 무신론자의 열띤 공격으로 부터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려는 기독교 변증가들의 논쟁이 뜨겁다.

하지만 적어도 내 경험상 오늘날 대다수의 비유신론자(non-theist)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 (atheist)가 아니라 apatheist로 분류될 수 있는 부류의 사람들인 듯 하다. Apatheism 이라는 단어는 무관심이라는 의미를 가진 apathy 와 유신론을 의미하는 theism 이 결합되어 생겨난 신조어이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무관심함을 의미한다. 지적으로 게으른 세계관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Apatheism은 “귀차니즘”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로 게으른 현대 문화와 잘 맞물려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어 보인다.

1385261_10101922299263694_1102689944_n

Atheist와는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을 바탕으로 충분히 하나님에 관하여, 기독교에 관하여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나같은 크리스천이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설명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만큼 상당히 많은 atheist들이 나름 왜 기독교가 비합리적이고 무신론이 더 나은 세계관인지를 소통하는 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토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apatheist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감지되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의 삶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에 애써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답이 없어보이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면 머리에 쥐가 나서 그럴 수도 있고, 정말로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궁극적으로 apatheist들은 지적으로 게으른 무신론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적어도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apatheist들의 세계관은 많은 부분 무신론적이다. 거의 대부분, 이런 태도들의 기저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의 삶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존재한다고 쳐도 별 의미도 없는 하나님에 대한 공상을 하고 있느니 그 시간에 뭐라도 하나 더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게 현명하다는 것이다.

“깊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문제도 없고, 살펴보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그건 통상적이고 편안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슬픈 인생이다.” 조안 치티스터 (Joan Chittister)라는 사람이 했던 말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바라보아도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인생은 참으로 슬픈 인생이다. 만약 그들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기독교가 진리라면 고통과 죽음 등의 인간의 유한함에서 오는 불완전함으로부터 건져내어질 수 있다는 소망이 있고, 삶의 새로운 의미가 생기며, 참 회개를 통한 죄의 문제의 해결이 있으며,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전능자와의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와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관한 대화 자체를 귀찮아 하고 의미없게 여기는 apatheism은 세계관이라기보다 하나의 심리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일은 커녕 의미있는 이성적인 대화를 시작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인 윌리엄 레인 크레그는 apatheist를 전도하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고 말한다. 딱딱한 방법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접근을 취하기보다는 우선 서로에 대해 깊은 관심으로 시작하여 신뢰와 사랑이 쌓이면서 서서히 하나님에 대하여 진지한 태도를 가지는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도 과거에는 교회생활을 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출석하지 않게 되었고, 현재는 하나님, 신앙, 교회, 등에 대한 관심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자신의 모습 속에서 일종의 “자유함”을 얻은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는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도전을 주고 싶어서 대화도 많이 시도해 보았지만 쉽사리 꺼진 불씨를 다시 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의미심장한 내용을 들었다. 그들이 뭣도 모르던 과거에는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교회에 관심을 끄고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범람하는 세속 철학과 사상, 문화의 도전속에서 교회가 그들에게 지적으로 만족할 수 있을만한 대답을 제공하지 못했기에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게 변증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변증이 aptheist의 마음 속에 꺼진 신앙의 불씨를 다시 지피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지적으로 정합성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추구하려는 바람직한 모습을 가진 크리스천의 마음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이 계속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다는 점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넘어가는 안타까운 부분이다.

영적 황무지에서 영혼을 건져내려면…

dry-desert-wasteland

종교사가인 마틴 마티는 모든 종교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했다. 첫째는 개인 구원의 메시지 또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고, 둘째는 세계를 해석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왜 전례 없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과 같은 시점에 기독교에서는 개인의 경건과 구원만 강조되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는 일에 대한 관심은 턱없이 부족할까? 오늘날에 판치는 다양한 비/반성경적인 세속적 이데올로기들이 영혼구원을 방해하고 개인의 신앙을 뿌리부터 흔들어버리는 역할을 하는 사탄의 도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고도 무시하는 것일까. 기독교와 경쟁관계에 있는 세속적 이데올로기들을 기독교의 관점으로 철저히 가르쳐서 분석/비판할 수 있는 훈련을 통해 분별력을 기르는 과정이 결여된다면 장차 대학에서, 사회에서 직면할 지적 싸움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모든 방면에서 철저히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세계를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반/비성경적인 세속적 사상들을 빌려올 수 밖에 없다.

이런 지적인 작업을 외면한 채 개인적인 관계와 정서 중심의 치유영역으로 물러서는 종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하는 현대의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왜 기독교는 여전히 삶과 실재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포괄적이고 통일된 세계관이라고 제시하는데 기울인 노력에 비해 개인의 구원, 개인의 경건, 개인의 영성, 개인의 교제와 같은 것들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그 결과로 기독교는 사실(객관적이고, 공적으로 검증 가능한 진리)의 영역과 가치(사회적으로 구성되는 혹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미들) 의 영역으로 나뉘는 이분법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객관적인 진리/사실이 아니라 ‘네게는 진리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니다’라는 보편적이지 않고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신앙은 당연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짐에 따라 오늘날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기관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신빙성을 잃게 된 것이리라.

신앙에 있어서 개인적인 부분들이 중요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분위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기독교를 통일되고 포괄적인 진리로 제시함으로써 이미 충분히 강조된 개인적인 영역에 좀 더 탄탄한 기초를 제공하여 균형을 찾는 일이 아닐까. 기독교가 모든 차원에서 진리임을 확신시키고 엄격한 합리적, 역사적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동시에 최고의 영적 이상을 성취할 수 있는 진리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듯하다. 그리스도인이 믿고 전하는 하나님이 실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면 기독교는 계속해서 진리의 자리에서 서서히 물러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