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본받을 대상이 아닌 믿음의 대상

한 동안 왜 오늘날 거의 모든 설교는 우리의 행함과 예수님을 본받음, 성화와 같은 내용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이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그 또한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흠이 없으신 분이다. 그 분은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엄두조차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을 우리가 본받아 닮아가야 할 일종의 롤모델로 제시해 주신 것이 아니다. 기회만 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육신의 정욕과 내 가치만을 찾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 존재가 선악과 따먹고 타락한 우리 인간이 아니였던가. 인간은 애초에 예수님을 본받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이지 본받을 롤모델이 아니다.

‘예수님은 본받을 대상이 아닌 신앙의 대상이다’ 라는 다소 자극적일 수 있는 글을 썼더니 다년간 많은 분들이 성경구절들을 제시하시며 여러 지적을 해주셨다. 그 구절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자체가 잘못됬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예수를 사랑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도가 자연스레 변화되어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예수는 강단에서 백날 예수님 닮아라 외친다고 닮게 되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하면 더 예수님을 닮아서 온유하고 사랑스럽고 지혜로운 자가 될수 있을까를 고민한다고 예수님 닮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닮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성령충만한 것이다.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가슴 깊이 깨닫고 성령충만함을 받기위해서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매일 철저히 깨닫고 무너지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우선되어야한다.  오늘날 강단에서는 이런 과정이 많은 부분 생략 혹은 축소된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이유, 방법, 등에 대한 내용으로 메꿔지고 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은혜속에 젖어 변화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기도와 이끄심, 도우심 등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예수를 닮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백날해도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하고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자책을 하는가 하면, 눈꼽만큼의 성품의 변화가 보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것을 가지고 뿌듯해하며 자기가치를 챙기기에 급급하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휠체어를 의지하며 피를 토하듯 쏟아냈다는 생전 마지막 설교에서 이 부분을 강하게 이야기 하신 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엽고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김성수 목사님이 설교 때 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난다.

설교는 ‘여러분, 우리가 거룩한 삶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시다.’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들에 대한 소개와 그 아들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여야 하고 적용은 살아있어 운동력이 있는 그 말씀에 의해 일어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일을 하게 해야 인간의 자랑이 없는 것이지 말씀을 전하는 자가 그 적용부분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설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아들이 하신 일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 스스로가 그 복음의 대상 속으로 들어가 일을 합니다.

혹자는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된 후에 맺어야 할 열매, 행함에 대해서 자주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존 맥아더 목사님이 미국에서도 보수적이고 철저히 성경적이기로 소문이 난 그의 Grace Community Church의 교인의 상당수가 구원받지 못한 자들 일것이라고 말했던 것 만큼 구원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듯 하다. 강단에서는 지속적으로 회개의 촉구와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울려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Paul Washer 목사님도 가는 곳마다 그렇게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눈물까지 쏟아내며 청중들의 양심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기독교는 여러분과 저의 작은 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행햐느냐와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이전보다 얼마나 더 변화되고 나아졌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분의 흠없고 완전한 의가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분을 믿으면 그 분의 의가 여러분께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 분의 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니 중단하십시오 

이것들은 절대로 여러분을 그 어디로도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 멀리 가기전에 멈추십시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순간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가엽고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뿐입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를 만인이 본받아야 하는 아름다운 것으로 변질 시키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의 자아인식의 변천사

543908_10101352979934194_1225535091_n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성숙해져가고 신앙이 더 깊어질 수록 그리도스도인의 자아인식이 어떻게 변해야하는지는 사도 바울을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회심 전 바울은 얼마나 율법적으로 완벽한 자였으며 얼마나 종교적으로 열심을 낸 사람이였는지…  하지만 회심 후에 그는 자기 자신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라고, 또 “사도 중에 가작 작은 자”라고, 또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칭했고, 생해 말년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까지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몇년 전 자기사랑에 대하여 어느 목사님과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난다. 교묘하게 또 애매하게 자기사랑을 이야기하시던 그 목사님께 사도 바울 뿐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희생되었던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 순교자들, 또한 영적 거장들이 한결같이 자신에게서 아무런 가치도 찾지 않았고, 죽는 그 날까지 죄악된 자신의 모습과 씨름했으며, 그런 못난 모습들조차도 받아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했음을 역설하며 그것이 성경적인지를 물었던 것을 기억이 난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라는 메세지들이 교회에서 사라지기를 기도한다..

1. 회심 전 바리새인 시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 갈 1:13-14 –

2. 회심 직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 고전 15:8-9 –

3. 회심 후 조금 더 성숙한 사도가 되었을 때: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 엡 3:8 –

4. 생애 말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딤전 1:15-16 –

행복의 이유

친구 중에 영적인 관심이 꽤 높은 놈이 하나 있다. 하나님의 존재, 내세, 진리 등의 추구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영적인 관심이라기 보다 남자치고 상당히 예민하고 섬세한 이 놈의 성향으로 봤을 때, 세상에서 자신이 겪은 나름의 고난과 어려움들 때문에 인생의 의미나, 악, 고통, 행복 혹은 성공 따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게 된 케이스에 더 가깝다. 나와 종종 철학적/신학적 (나도 별로 아는 것도 없지만) 대화나 예수님,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확실히 이 친구의 주된 관심사는 아직까지 내세보다는 현세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성공과 행복이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 못해 영적인 방황을 하고있는, 항상 내 기도제목에 올라 있는 그런 놈이다. 최근 이 놈이 행복한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름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Deepak Chopra 라는 유명한 뉴에이지 구루가 한 말을 포스팅 했다:

Be-happy-for-no-reason

“아이처럼 아무 이유없이 행복하라. 당신이 어떤 이유 때문에 행복해 한다면, 그 이유가 사라졌을 때 곤란해질 것이다.”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괴로워 하던 놈이 결국 내놓은 답이 고작 “아무 이유없이 행복하라?” 내겐 거의 “해답을 못 찾겠으니 그냥 포기하고 아무 이유없이 행복하다고 최면이라도 걸겠다”라고 다짐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발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놈은 이 말이 참으로 멋진 통찰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써 이 세상에서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찾는 일이 불가능 하다는 점에서 이 친구는 사실 제대로 가고 있었다. 나름 어렴풋하게나마 이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 것들인지를 감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훨씬 유리함을 나도 알았기에 나도 감사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거할 때에만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 놈이 정반대로 아무 이유와 근거도 없이 행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되지도 않는 뉴에이지 구루의 사상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공감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이 크다. 또 “be happy for no reason”과 같이 인간의 존재와 의미의 근거가 되는 근본적인 기반을 교묘하게 허물고 공중에 붕 띄워 버리는 문구에 현혹될 수많은 영적 구도자들을 생각하면 상당히 걱정스럽다.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썩어 없어질 이 땅에 기반을 두고있는 궁극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 또 행복을 찾아보겠다고 발버둥치며 거듭 실패만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자존심 상해 내놓은 변명은 결국 “특별한 이유없이도 행복하도록 하자”라는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는 과정 속에서도 붙들 수 있는 변치않는 소망의 이유가 있기에 인내하고 견뎌낼 수 있으며, 참 기쁨으로 넘쳐나는 하나님 나라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깊은 영향 아래 있는 오늘 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내 친구 놈과 같이 영적인 고민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의 아픔에 더 민감해지고, 그들을 더 잘 이해하며, 그들과 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