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부모를 떠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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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유부남이 되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결혼에 관한 여러 기독교 서적 및 자료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것들을 읽으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국 목사님들 혹은 가정사역자들이 썼다는 책들에 하나같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는 구절이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구절은  외국저자들의 저서들에 비해 한국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책들 속에 훨씬 더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경향을 보았다. 특히 이 구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라는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유교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결혼을 한 후에도 부모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경우가 많아 결혼생활이 어려워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일을 확실하게 해야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라는 설명과 함께 남자가 제대로 부모를 떠나지 못했을 때에 어떤 어려움들이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항상 뒤따라온다. 그리고 다양한 실질적인 지침들도 알려준다. 이 모든 시도에 대한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을 하면 할 수록 남자가 부모로부터 온전하게 독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 한다라는 주장에 근거로 이용되는 이 구절의 진의는 다른 곳에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한마디로 이런식의 해석은 유교적인 색채가 강한 한국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탄생한 본질을 빗겨간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석 때문에 이 구절에 숨겨진 더 깊은 의미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는 창세기 2:24의 말씀은 “남자야 내가 너한테 명령하는데 부모님을 꼭 떠나서 네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뤄라“라는 뉘앙스가 아니다. 그보다는 결혼을 하게되면 “남자는 자연스럽게 자기부모를 떠나게 될 것이며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남자보고 “너 꼭 부모를 제대로 떠나서 온전히 독립된 가정을 꾸려야한다”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상관없이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부모를 떠나게 될 것이고 온전히 독립된 가정을 꾸리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쉬운 성경도 “… 아내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라는 명령조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썼고, KJV와 NIV로 비롯한 여러 영문번역을 살펴보아도 명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번역은 없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아담은 이 땅에서 육체의 부모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굳이 부모를 이야기해야한다면 아담의 부모는 그를 손수 지으신 하나님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부모를 떠나라고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떠나라는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된다. 하지만 아담이 예수를 모형하는 인물임을 기억한다면, 이 구절은 훗날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모이신 하나님을 떠나 신부인 교회와 연합하여 교회를 구원하시는 그림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신부된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부모를 떠나야하는 고통을 감내하셔야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담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창세기 2:24 뿐 아니라 에베소서에서도 확인된다:

…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5:31-32-

“부모를 떠나” 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창세기 2:24에 있는 “부모를 떠나”라는 구절은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가 죄인들을 구원하게 되실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를 아담과 하와의 결혼하는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다. 이 구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담겨있는 복된 구원의 메시지이지, “부모를 제대로 떠나서 아내를 힘들게 하지말고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어라”라는 명령이 담긴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부모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이라는 고통을 경험하신 예수님의 아픔을 결혼이라는 제도속에서 모든 남자가 어떤식으로든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자기 자신을 내어드려야했던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어질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하여 연단되어지고 천국백성으로 지어져 갈 것임을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십자가

문을 열다

우리가 십자가를 얼마나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흔히 부르는 찬양 속에 나오는 십자가라는 단어를 근대적 처형법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로 바꾸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교수대 교수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오 너의 슬픈 세상 눈물 너의 쌓인 아픔을
사형대 앞에 너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교도소의 길을 걷는 자에게

예수 당시의 십자가가 권력에 대항한 정치범들이 겪는 처형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개사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바뀐 가사에 강한 거부감과 불쾌감, 또는 기괴함을 느낀다. 심지어는 거룩한 찬양이 모독당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우리가 십자가를 달콤하고 평온한 사랑과 은혜의 상징으로만 상상하고, 십자가가 원래 뜻하던 죽음과 고통, 오욕과 공포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감옥과 사형대는 악랄하고 더러운 범죄자들을 위한 것이지, 거룩한 신앙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말한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수모와 고통이 우리에게는 승리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상징하는 잔혹한 폭력과 죽음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대신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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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절대 믿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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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보고 기복신앙의 괴수라고 하는데, 한국이 복을 받아 잘 살게 되었기에 오늘날 G20의 세계 강대국 수장들이 한국에 와서 회의를 하는 것.” – 조용기 –

“천막 치고 가마니 깔고 ‘할렐루야’ 하면 누가 관심을 갖겠느냐.” – 조용기 –

(일본 지진에 대해) “일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조용기 –

“두고 보라. 한국이 계속 주님을 섬기면 세계 1, 2등 부자가 될 것” – 조용기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로부터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해방시켜주신다” – 조용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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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상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에 관한 망언 그리고 “선한 영향력”이라는 가면 속 인간의 욕망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 1:28 – 

창세기 1장 28절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27절)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이 구절은 참으로 많은 방식으로 왜곡 되어져 온 듯하다. 필자는 최근에도 중소기업 CEO로써 소위 세상에서 성공 좀 했다는 어느 장로가 자신의 “간증” 시간 때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세상에서 성공하고 고지를 점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라”고 직접적으로 명령하시는 것이라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 경험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허락하신 은혜와 축복이 있다면 겸손히 나누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소명을 가지고 학업에 전념하는 젊은 청년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만 하면 될 것을 한국에서 자수성가한 자신의 “위대한 업적”에 관하여 보도한 방송 3사 뉴스 보도자료와 성공시대인지 뭔지 하는 TV프로그램 등을 영상자료까지 손수 준비해서 “간증” 전 한바탕 신나게 트는 저의는 도대체 무엇이며, 간증내내 잊을만하면 툭툭 터져나오는 자기자랑, 자식자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분이 세상적 성공을 일군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솔직히 이 분의 태도는 혼자만의 어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저렇게라도 드러내고 홍보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듣는 내내 안쓰러웠다. 이건희 회장이나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어디가서 굳이 이런 장황한 자기소개 할 필요는 없지 않던가… 이런 간증을 듣고 은혜스러웠고 큰 도전을 받았다는 젊고 신실한 주의 청년들의 반응은 고지론과 기복주의가 장로라는 타이틀로 꽃단장하고 성공이라는 화장품으로 적나라한 쌩얼(혹은 민낯)을 교묘히 가린채 교회 속으로 잠식해 들어와 교회를 골병들게 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보였기에 그 후로 여러 달동안 내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만 전후 문맥을 살펴보지도 않고 뚝 떼서 이상한 망언을 하며 고지론을 펼치는 분들이 많지만 이 말씀의 참 의미는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사람을 창조하시되”라는 말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을 많이 “출산”하라는 의미이며, 그 말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곧 참 그리스도인의 삶, 참 복음의 삶을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살아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의 삶,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사랑의 삶, 용서의 삶, 자기 부인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냄으로써 하나님 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영혼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하시는 것이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아주 높은 고지를 점령하여 되지도 않는 “선한 영향력” 끼치자고 발악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약간의 과장을 섞는다면 오늘날 “선한 영향력”이라는 표현은 아마 청년집회에서  “하나님”, “축복”, “기도” 만큼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건 몰라도 “죄”, “회개”, “자기부인” 등과 같은 개념들보다 훨씬 많이 등장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만큼 “선한 영향력”은 청년들이 가진 어떤 환상이며, 그들이 막연하게 추구하는 어떤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목회자나 장로 등이 청년들에게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매도하는데 자주 쓰여지는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한다면, 왜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에서 보란듯이 성공한 롤 모델이 되거나, 남들 앞에 나서서 발언할 수 있는 위치나, 조직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리더의 자리로 올라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겠다고 하는 것일까? 이런 사람들 중에 자신의 물질과 커리어를 모두 내려놓고 영화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처럼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섬기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라고 하면 몇명이나 가겠다고 할까?

사실 “선한 영향력”이라는 고상해보이는 이 개념 자체가 인간의 끝없는 더럽고 추악한 욕망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내어놓는 것 아니였던가. 돈, 권력, 섹스로 대변되는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기는 쪽팔려서 폼도 나지 않고 인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에 계속 “선한 영향력”을 외치며 도덕적으로 본받을 만하며 고상한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던 것 아니였던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일에 이 만큼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선한 영향력”이라는 표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만큼 간사한 것이 또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보는 영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 오늘날 교회의 모습만큼 씁쓸한 것이 또 있을까….

비판, 판단, 정죄… 오늘날 교회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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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비판하지 말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최근 어느 설교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을 발견했다. 물론 대놓고 비판하진 않는다. 항상 그렇듯이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깊게 들으면 자명해진다. 사랑을 핑계삼아 방패막이를 삼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한 비판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그야 말로 모순이지만, 아무 생각없이 그저 아멘만을 연신 내뱉고 있는 청년들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곧 해탈이라도 할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설교자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사랑하고 감싸주기보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답답하고 안탑깝게 여기는 마음에서 한마디 던질 것일 수도 있다.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는 공식을 마음대로 세워놓은 후에 말이다.

오늘날 교회는 ‘비판’이라는 단어에 매우 민감한 듯 하다. 비판이라는 개념을 무조건 부정적인 것, 분열을 조장하는 것, 진보가 아닌 퇴보를 가져오는 것, 인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정해놓고 조금이라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다 싸잡아 사랑이 없고 부정적이며, 미성숙하며, 신앙심이 깊지 못한 사람으로 은근히 판단, 정죄, 비판해버린다. 겉으론 사랑으로 아름답게 포장했지만 어쩌면 자기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뒤에 숨겨진 그 비판과 정죄의 칼날이 얼마나 교활하고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잘 드러내는 것인지….

물론 해로운 비판은 당연히 존재한다. 남을 비판함으로써 내가 상대적인 우월감을 얻기 위한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정당한 비판은 진솔하고 양심적인 마음에 떨어졌을 때 크나큰 유익을 가져온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비판은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이다. 이것을 통하여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되는 것이며, 나의 교만함이 지속적으로 꺽이게 되고, 이 설교자가 그렇게 외치던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서로 사랑과 격려도 중요하지만 비판과 바로잡음도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오늘날 교회는 타락할 만큼 타락했고 어떻게 이보다 더 변질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만큼 변질되어 있다. 세상에선 기독교가 개독교가 불리우며 조롱당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많이 가리워져있다는 사실이 이 설교에서 언급되었다. 더 내려갈 곳도 없이 밑바닥에 곤두박질 친 기독교에게 지금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교회안에서의 따끔하지만 건설적인 비판이며 개혁을 통한 참 복음으로의 회귀이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앞날, 더 나아가서는 한국 기독교 그리고 세계 기독교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비판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소외되더라도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비판, 판단,정죄를 하지말고 사랑으로 감싸주라는 한없이 아름답고 관용적이고, 성숙하며 사랑으로 충만한 것처럼 다가오는 이 말이 사실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교회가 기복주의에 물들어 무당잡교가 되든 반쪽 복음이 강단에서 울려퍼지든 그저 포용하라는 오늘날 설교자들이 가장 즐겨 이야기하는 이 무책임한 요구는 어쩌면 사탄이 오늘날 가장 즐겨쓰는 속임수일 수도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리선포에 온 마음이 가 있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진정으로 외쳐야 할 메시지중에 하나는 잘못가고 있는 교회를 책망하는 메시지이자 복음을 변질시키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경고다. 이런 설교는 본질적으로 비판적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특정 인물을 언급해야하는 것일 지라도 설교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맞겨진 양들에게 올바른 분별력을 사용하여 무엇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것인지 가르칠 책임이 있다. “비판하지 말라”를 일종의 목회철학으로 삼고 평생 비판 한번 안하는 설교자는 평생 설교해봐야 적을 만들기 꺼려하고 청중의 귀를 의식하는 듣기 좋은 설교만을 추구하는 가짜 설교자, 혹은 후하게 잘 쳐줘도 반쪽 설교자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이것이 조엘 오스틴을 주일 설교에서 거의 이단으로 정죄, 강하게 비판하고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상암대회 설교에서 잘못가고 있는 한국 교회에 눈물을 쏟아내며 회개를 촉구하는 메세지를 강하게 전한 옥한흠 목사님을 내가 존경할 수 밖에없는 이유이며, 조엘 오스틴을 비판하기는 커녕 주일 예배 때 적극 추천하기까지 하던 몇몇 설교자들을 내가 신뢰할 수 없는 이유다.

교회는 비판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즐거워 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비판을 받고 그것을 수긍하여 내 자신을 변화시키려면 뼈를 깍는 고통이 수반된다. 그런 과정이 싫은 인간은 그냥 비판을 나쁜 것으로 만들어놓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최대한 억압또는 통제하려고 한다. 그것을 설교자가 더 압장서서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자신이 받을 비판의 싹들을 최대한 줄이고 존경받는 설교자로, 듣기좋은 설교로 뼛속까지 기복신앙인 수만성도를 거느린 “성공한” 목사로 성장하여 다수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그랬듯 기독교에 욕을 한바가지 먹게 할 기반이 여기에서 마련되는것은 아닐까…

선한 것 하나도 못 내어놓는…

제 5 문: 당신은 그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과 내 이웃을 미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8 문: 그렇다면 우리는 너무 부패하여 선이란 전혀 행할 수도 없고 모든 악을 향해 기울 뿐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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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너무 추악하고 부패하여 선한 것이라곤 단 하나도 내놓을 수 없는 그런 쓰레기 같은 존재다.

내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은…
누구 말처럼 나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남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윤리적인 삶을 살기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선한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매일 매일 죽고 거듭나는 것이다.

변질된 오늘 날의 다섯 솔라

종교개혁 당시 개혁주의자들의 기본 믿음을 나타내는 ‘다섯 솔라’가 오늘 날 어떻게 변질 되었는가?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오직 경험
절대적인 진리인 성경의 말씀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대체되었다.
내가 경험 했다면 성경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오직 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과 십자가의 보혈은 온데 간데 없고,
모든 것이 ‘나’ 위주로 돌아간다.

3. 오직 은혜(Sola Gratia)       —> 오직 축복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가 없으니 은혜가 설 자리는 없다. 축복이 최고다.

4. 오직 믿음(Sola Fide)          —> 오직 번영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일 따윈 관심 없다. 그냥 이 땅에서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오직 나에게 영광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내 영광 챙기기에 바쁘다.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나를 높여주지 않으면 기분 나쁘다.

삼위일체에 대한 고찰

dorothy

작가는 글을 쓰는 창조적 행위를 해석하는 창조적 힘을 통해서야 아이디어를 인식할 수 있고, 창조적 행위가 창조적 힘 안에 아이디어를 드러낼 때에야 창조적 행위를 인식하며, 또한 창조적 행위에서 드러난 아이디어의 발현으로서만 창조적 힘을 이해할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하나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신 창조 능력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창조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본받아 창조적 행위, 힘, 아이디어라는 세가지 위격으로 나타난다. 지적 행위로써 세 위격으로 ‘구분’할 수는 있지만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그 본질까지 ‘분할’할 수는 없다…

– 도로시 세이어즈, 창조자의 정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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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문학가로써 이름을 떨친 여성 크리스천 작가 도로시 세이어즈는 그녀의 저작 ‘창조자의 정신’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그녀의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성부, 성자, 성령 각각의 세 위격이 하나라는 삼위일체의 개념은 종종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다가온다. 하지만  “세 명의 다른 사람이 사실은 한 분의 하나님”이라는 식의 이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믿음을 가지는 일에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세이어즈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삼위일체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글을 쓰는 창조적 행위, 힘, 아이디어의 관계로 빗대어서 설명하고자하는 위의 글이 만약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몇번이고 천천히 다시 읽어보라. 어느 순간 엄청난 깨달음이 올 것이다.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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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마태복음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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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문은 좁아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셨다. 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처럼 무섭지만 중요한 메세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구원에 관해 예수님께서 하신 엄중한 경고를 우리가 듣기에 불편해서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평생 성경적으로 살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심판의 때에 정작 예수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매몰차게 내치신다면 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인지.

구원은 값비싼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 순종하며 내 삶을 내어드림으로써 전적인 헌신으로 그 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저 단 한번의 영접기도와 성령님의 역사로 가장한 감정적인 회심, 그리고 삶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신앙고백, 하나님보다는 나에게 초점이 맞춰진 신앙관 등으로 신앙생활을 채우고 그것들을 통해 구원을 확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항상 반성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전인격적인 행위이며 그러한 믿음이 동반된 회심 후에는 반드시 성화의 과정이 뒤따르게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살해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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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사랑 받고 있지요 (x2)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사랑 받고 있지요

편사:당신은 살해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살해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매일 죽고 있지요 (x2)

묵시속에 계획된 하나님의 살해는 우리의 역사속에서 현실이 되고
당신이 이세상에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살해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꾸준히 죽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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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라는 단어 선택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고 이의를 제의하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쓴다.
여기서의 “살해”는 나의 자아의 철저한 죽음을 일컫는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말한다.
죄악에 빠진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태초 전부터 이미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들은
매일 매일 죽으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구원 받을 자격없는 자임을 처절하게 깨닫으라는 것이
하나님께 등 떠밀려 역사속에 내려오게 된 이유다.

영국의 위대한 시인 존 던은 Holy Sonnet 이라는 자신의 시에서
“당신이 저를 강간하지 않으시면 순결하지도 않나이다.” 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나님의 강간”이라는 표현만큼 불경스러운 표현이 또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의미는 분명하다. 온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강제로라도 제압하여
거룩하고 순결하게 해달라는 소망인 것이다.

“살해”도 비슷하다.
“죄악된 나의 자아를 죽이고 예수로 채워진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고 계획하시고 몰아넣으신 죽음, “살해”를 의미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사도 바울도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다.
매 순간 순간마다 자신의 욕망과 욕구와 욕심과 소원과 비전과 야망을 죽였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도 바울을 매일 매일 “살해”하신 것이다.
그의 죽음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이 온전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살해”라는 단어에서 오는 부정적인 뉘앙스에서 자유한 후
읽었을 때 과연 원곡이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들의 죄악된 본성을 싫어하시는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왠 이단스러운 글인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리라.

내려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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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 혹은 내려놓는다는 말은  아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 중에 하나가 되지 않았나 싶다.

“당신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모두 내려놓으세요”
“하나님 앞에 제 문제들을 내려놓고 기도합니다”
등등..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내려놓음의 의미가 점점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포기하거나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주권을 완전하게 비워 포기함으로써 나의 주인됨을 완전히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심리적 불안감, 두려움, 의심, 마음의 상함 문제 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의 삶을 계획하고 운영하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나의 능력과 노력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에 의지하려는 태도를 일컷는다.

이상하게도 이런 의미의 내려놓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능력을 발휘할 생각을 하지않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마라’라는 의미가 되어버린 듯하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내 자신을 온전히 비움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더 마음을 다하고 의지를 가지고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써 마땅히 해야할 도리가 아닌가. 내려놓는 일이 현실 속의 자기 자신의 모습과 자신 앞에 닥친 모든 문제들, 관계들을 마냥 나 몰라라 다 포기하고 내려놓는 일인냥 되어버렸다. 자기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모든 실재를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달픈 인생을 산다. 인생에 있어서 되는 것 하나 없고 모든 불운과 고난은 다 내가 받는 듯 한 느낌을 항상 받으면서 사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지칠대로 지치고 잃을대로 잃고 마음은 걍팍해질 대로 걍팍해진다. 마음은 걱정 근심으로 메마르고 정서불안에 우울증까지 겹친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답이 나오지 않아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밥먹 듯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물론 내려놓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의 내려놓음을 말하는가? 이 모든 어려움 앞에서 겸허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구하고 의지하여 행한 일의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그런 내려놓음인지 아니면 얽히고 섥혀서 꼬일대로 꼬여버린 복잡하고 우울한 현실으로부터 도피하여 일시적인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한 내려놓음인지 한번 생각해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