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부모를 떠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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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유부남이 되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결혼에 관한 여러 기독교 서적 및 자료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것들을 읽으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국 목사님들 혹은 가정사역자들이 썼다는 책들에 하나같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는 구절이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구절은  외국저자들의 저서들에 비해 한국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책들 속에 훨씬 더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경향을 보았다. 특히 이 구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라는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유교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결혼을 한 후에도 부모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경우가 많아 결혼생활이 어려워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일을 확실하게 해야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라는 설명과 함께 남자가 제대로 부모를 떠나지 못했을 때에 어떤 어려움들이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항상 뒤따라온다. 그리고 다양한 실질적인 지침들도 알려준다. 이 모든 시도에 대한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을 하면 할 수록 남자가 부모로부터 온전하게 독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 한다라는 주장에 근거로 이용되는 이 구절의 진의는 다른 곳에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한마디로 이런식의 해석은 유교적인 색채가 강한 한국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탄생한 본질을 빗겨간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석 때문에 이 구절에 숨겨진 더 깊은 의미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는 창세기 2:24의 말씀은 “남자야 내가 너한테 명령하는데 부모님을 꼭 떠나서 네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뤄라“라는 뉘앙스가 아니다. 그보다는 결혼을 하게되면 “남자는 자연스럽게 자기부모를 떠나게 될 것이며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남자보고 “너 꼭 부모를 제대로 떠나서 온전히 독립된 가정을 꾸려야한다”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상관없이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부모를 떠나게 될 것이고 온전히 독립된 가정을 꾸리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쉬운 성경도 “… 아내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라는 명령조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썼고, KJV와 NIV로 비롯한 여러 영문번역을 살펴보아도 명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번역은 없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아담은 이 땅에서 육체의 부모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굳이 부모를 이야기해야한다면 아담의 부모는 그를 손수 지으신 하나님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부모를 떠나라고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떠나라는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된다. 하지만 아담이 예수를 모형하는 인물임을 기억한다면, 이 구절은 훗날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모이신 하나님을 떠나 신부인 교회와 연합하여 교회를 구원하시는 그림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신부된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부모를 떠나야하는 고통을 감내하셔야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담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창세기 2:24 뿐 아니라 에베소서에서도 확인된다:

…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5:31-32-

“부모를 떠나” 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창세기 2:24에 있는 “부모를 떠나”라는 구절은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가 죄인들을 구원하게 되실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를 아담과 하와의 결혼하는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다. 이 구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담겨있는 복된 구원의 메시지이지, “부모를 제대로 떠나서 아내를 힘들게 하지말고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어라”라는 명령이 담긴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부모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이라는 고통을 경험하신 예수님의 아픔을 결혼이라는 제도속에서 모든 남자가 어떤식으로든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자기 자신을 내어드려야했던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어질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하여 연단되어지고 천국백성으로 지어져 갈 것임을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3

일사각오를 빕니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저를 위해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 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여!

저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제 발 아래에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2

고난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 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 1

제 영혼을 주님께

오, 주님 예수여!

제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제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제 목숨이 끊어질 때

제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저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저의 고향입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제 발을 씻어서

저로 하여금 하늘 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저를 깨끗하게 하셔서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제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 (변증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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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
저자: 조쉬 맥도웰 & 션 맥도웰
평점: 4/5

– 간략한 소개 –

전세계적으로 기독교 신앙 서적치고는 경이로울 만한 숫자인 1500 만부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준 책으로 자리매김을 한 책인 조쉬 맥도웰의  <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 (원제: More than a carpenter) >>는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서는 크게 관심을 끌진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일반 대중을 겨냥한 변증 입문서 정도에 해당하는 책이기 때문에, 술술 쉽게 읽히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그 어느 것도 결코 대충 읽어넘길 만한 것이 없을만큼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 영적인 고민을 하며 진리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길 원하는 영적 구도자,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적인 회의주의자, 무신론자들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기독교 신앙에 관한 정직한 의심, 의문점들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유익한 책이다. 이 글에서는 이 책의 각 장별로 요약과 함께 간략한 서평을 남기고자 한다.

– 1장: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영혼 안에는 행복과 의미 있는 삶을 향한 목마름이 있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행복과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1) 나는 누구인가? 2) 내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3)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 기독교 또한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의 삶 속에서 이 세 질문에 대한 독창적인 대답을 내어놓고 있다. 저자들은 이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이 과연 신빙성이 있는지, 진리인지를 이 책에서 탐구하고자 한다.

– 2장: 성육하신 하나님 –

2장에서는 이 땅에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신적 자의식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탐구를 한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였다는 담대한 주장을 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 사람들이 부처나 무하마드나 공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만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은 매우 배타적이며 편협하고 옹졸하게 보인다며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를 따르는 많은 크리스천들을 핍박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던져야 할 정말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이 정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가?” 이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만약 ‘그렇다’라면 문제의 쟁점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은 참인가?” 이 될것이다. 신약성경을 얼핏 읽다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한번도 직접적으로 한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신약성경 여러 곳을 인용하며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명백하게 언급하셨다고 설명을 한다. 예를 들면:

1 )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5:18)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써서 언급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좀 더 사적인 표현을 썼고, 또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를 동등선상에 두었다.

2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라는 단어는 본질 또는 속성에 있어서 하나임을 뜻하는 표현으로써,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3 )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요 8:19) 4 )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요 12:45) 5 )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3) 6 )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요 5:23)

3 )-6 ) 모두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셨음을 보여준다.

7 )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여기서는 제 3자인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을 함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생각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8 )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막 14:60-62)

이 본문에서 나오는 ‘인자’라는 표현은 다니엘서 7장 13-14절에 나온 표현을 예수님께서 인용한 것이며,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성모독죄를 범했다며 분노했다는 기록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3장: 당신은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던 그 파격적인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3장에서는 저자들이 예수님이 했던 이러한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옥스포드에서 가르쳤던 CS 루이스가 예수님에 대해서 했던 유명한 말이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 사람들은 자주 예수에 관해서 어리석은 이야기들을 한다. 나는 그와 같은 일을 막으려고 이 자리에 서 있다.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선생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그의 주장을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단순히 인간에 지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예수가 말한 것과 같은 말들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 선생이 될 수 없다. 그는 미치광이이거나 혹은 지옥의 악마일 것이다. 당신은 선택해야만 한다. 이 사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미친 사람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형편없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취급해서 입을 다물게 하거나, 그를 악마로 여겨 그에게 침을 뱉으며 죽일 수도 있다. 혹은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위대한 스승으로 추켜세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자. 그는 우리에게 그런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

CS 루이스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하여 삼자택일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저 위대한 위인 중 한명정도로 취급하며 대충 대충 넘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파격적인 주장을 한 예수님은 망상에 빠진 정신나간 미치광이이거나,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악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진리만을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했던 주장들은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 예수님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예수님은 거짓말을 했거나,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런 주장을 한 정신병자 정도일 것이다.

– 예수는 거짓말쟁이인가? – 예수님이 고의로 거짓말을 하여 사람들을 선동하려 했던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몇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의로 남들을 속인 사람이라면 그는 위선자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가? 2. 예수님이 그렇게 파격적인 거짓말을 했다면 어떻게 강한 편견이 있는 당시 사람들 앞에서 유례없는 선행과 도덕적으로 이대하고 숭고한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었는가?

– 예수는 정신병자인가? – 오늘날 우리 교회 청년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나폴레옹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다면 그 청년은 분명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할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던 주장은 사실 이 청년이 나폴레옹이라고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파격적인 주장으로 유대인들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는 정신착란에 따르는 비정상적이고 불균형한 상태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을 여러 권위있는 정신과전문의들이 성경의 기록을 근거로 진단, 결론 내렸다. 예수님은 심오한 말을 했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상을 설파했으며, 가는 곳마다 수 많은 군중들이 따를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킨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정신병자였다는 생각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생각이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도 아니고 정신병자도 아니라면, 예수님이 했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이 정말로 성육신하여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도자들은 매우 진지하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땅에서의 여러분의 삶과 영생에 관하여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4장: 예수가 있다면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라? –

오늘날 인간의 지식에 있어서 과학이 가지는 권위는 거의 독보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라는 식의 말을 하며, 예수님의 신성이나 부활과 같은 문제들은 과학적이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는 수 많은 사실들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의 존재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신념들은 과학적으로 증명 불가능 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과학적인 증명은 어떤 사실에 의문을 가진 사람 앞에서 가설을 세우고 반복적인 실험을 통하여 같은 결과를 도출해내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이 사실인지 보여주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증명이란 어떤 현상의 측정과 실험 혹은 반복되는 관찰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나는 2013년 5월 3일 점심으로 삼겹살을 먹었다’라는 주장을 어떻게 반복적인 실험을 통하여 증명해 낼 수 있겠는가?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성격상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해 낼 수 없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날 고기집에서 계산한 영수증을 제시한다든지, cctv에 찍힌 고기를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증거로 제출한다든지, 아니면 고기를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목격자를 찾든지 해야하는 법적-역사적 증명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방법은 법정 재판에서 이루어지는 방법과 동일한 방법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로 이런 법적-역사적 증명의 범주에 속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것은 과거에 단 한번만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기에, 반복적인 실험과 관찰을 통하여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 5장: 신무신론의 도전 – 

2001년 9/11 에 있었던 뉴욕에 있는 WTC 비행기 테러 사건을 기점으로 소위 ‘신무신론자’로 불리우는 4명의 인물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 리처드 도킨스 (God Delusion의 저자)

2. 크리스토퍼 히친스 ( God is Not Great의 저자)

3. 샘 해리스 (Letter to a Christian Nation의 저자

4. 데이얼 데닛 (Breaking the Spell의 저자)

이들은 각각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오른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한 자신의 책들을 통해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탔고,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기도 했다. 저자들은 이런 신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니체, 프로이드, 마르크스, 러셀 등의 과거 무신론자들이 몇 세대 전에 했던 주장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신무신론자들만의 두드러지는 특징이 몇가지 있다고 말한다:

1. 신무신론주의는 진지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2. 과거의 무신론과 달리 신무신론자들에게는 종교적 믿음에 대한 관용이 없다. 그들은 종교는 악이라는 공식을 내세우며 모든 종교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신무신론자들은 특별히 기독교에 대해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붓는다.

또 신무신론자들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 중 하나는 종교는 맹신을 요구하며 오직 믿음에 기초한 반면에 무신론주의는 이성과 과학의 실증적 증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상당히 순진한 주장이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을 내세우며 초자연적인 존재가 불필요함을 주장하는 그들은 결정적인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 맹목적이고 물질적인 다윈의 진화 과정을 통해 발달해 왔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그것을 신뢰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무신론이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연한 과정의 산물인 인간의 두뇌가 우리로 하여금 그 세계를 이해하게 해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인 것이다. 결국 무신론자들은 이렇게 비합리적인 자신들의 세계관 속에서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경적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발전해 가는 이 세상의 과학적 지식에게 아무런 지지를 얻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신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현대과학은 오히려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가리키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생물학에서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는 생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불과 몇 나노미터 크기의 작은 세포 안에 백과사전보다 더 많은 방대한 정보가 저장되어져 있는데, 무신론자들은 이렇게 복잡하고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세포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대답을 내어놓지 못한다. 반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겐 섬세하게 디자인 된 생명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우주의 미세조정 (fine-tuning)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주에는 실제로 각각 완전하게 미세조정되어야하는 20여개의 보편 상수가 있는데 대부분은 경이로우리만큼 정교하게 조정되어져 있다. 20 여개의 이런 상수들이 각각 0.0000000000001% 만이라도 달랐더라면 생명은 고사하고 우주 전체가 붕괴되어버렸을 것이라는 사실은 모든 물리학자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과학적 사실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신론자들은 내어놓을 수 있는 만족한 말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이런 과학적 증거들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온 우주를 정교하게 설계하시고 지으신 하나님의 대한 믿음을 더 견고하게 다질 수 있게 된다.

– 6장: 성경의 권위는 충분하다 –

이 장에서는 중요한 주제인 성경의 권위 혹은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신적인 영감을 받아 기록된 무오한 기록일 뿐 아니라 개개인의 삶 전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책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라고 믿지만 대다수의 불신자들은 성경이 그저 전설이나 허무맹랑한 환타지 소설을 써놓은 책이라는 생각이 만연하다. 저자들은 많은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성경의 기록들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들인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 사본들은 얼마나 정확하게 전승되어 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본들이 존재하는지 등을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설명한다. 이 작업의 결론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현존하는 그 어떤 고문서들과 비교해봐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사본들은 압도적으로 많으며, 신뢰할만하고, 또 정확하게 전승되어 왔다는 것이다.

고대시대에 성경사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로 생긴 오류들을 가지고 트집잡는 바트 어만(Bart Ehrman)이나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도마, 유다, 빌립, 베드로, 마리아 복음서 등에 이미 정경으로 채택된지 오래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들과 동등한 혹은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예수 세미나 (Jesus Seminar) 등의 문제점 등을 저자는 조목조목 비판하며 현재 우리가 정경으로 가지고 있는 성경의 권위가 충분함을 역설한다.

– 7장: 제자들의 삶과 죽음이 말하는 예수 –

6장에서 고대에 쓰여진 성경이 오늘날까지 신뢰할 수 있을만한 방법으로 전승되어 왔는지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7장에서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그리고 성경속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증언들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그 증언들이 거짓인지 신뢰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증언인지를 확인 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제자들의 삶이 그들의 증언들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변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 중 거의 대부분은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예수를 메시아이자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했고, 그 강한 확신 때문에 잔인한 방법을 죽임을 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모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마태는 칼로 죽임을 당했으며, 도마는 창에 찔려 죽었고, 다대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모두 어떤 거짓말에 의해 속았거나 정신이 나갔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들이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거짓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자들이 속은 것이 아니라 정말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확인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 할수 있을까?  그 답은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여러가지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몇가지만 이야기하자면,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비겁하게 숨었으며,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도마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의 상처에 손을 직접 넣어보기전에는 믿을 수 없다라고 했던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했던 도마가 있는가 하면, 예수를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비겁하게 자신의 안위만을 꾀한 베드로도 예수부활을 목격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또한 예수의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는 평생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형제인 예수가 터무니없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러 다니면서 가족의 명예에 먹칠하고 있다며 수치스럽게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돌로 맞아 순교하기에 이른다.

하룻밤 사이에 회의적이고, 비겁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기 바빴던 제자들이 180도 급변하여 예수가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이 진리임을 굳게 믿고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전파했음을 생각했을 때 그들의 증언이 얼마나 신뢰할만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 8장: 메시아를 오해한 유대인과 제자들 – 

변증적 맥락에서 비교적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8장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메시아의 모습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실려있다. 제자들 뿐 아니라 1세기 유대인들이 이해한 메시아는 유대민족을 로마제국의 정치적 억압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 회복시킬 정치적 지도자를 이해했다.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를 그런 메시아로 이해했기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을 때에 그들은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그들은 예수가 단순한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다 줄 존재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영원한 죄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이 예수가 참된 메시아임을 죽기까지 확신에 찬 모습으로 증거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 부여를 하게 되었다.

– 9장: ‘정통 유대인 엘리트’가 만난 예수 –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의 회심과 삶은 예수의 메시아 됨과 또 부활 사건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준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가말리엘의 제자로써 그 시대 최고의 학문을 접하고 섭렵한 엘리트였으며, 로마 시민권을 소지한 특권 계층이였고, 철저한 유대식 교육을 통해 자기 입으로 자신을 율법의 ‘의로는 힘이 없는자’라고 지칭할만큼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예수를 만나 회심하기 전에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가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제일 먼저 앞장섰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 바울이 극적인 체험을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확신하게 되어 삶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된 이 사건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다른 증언들과 함께 예수에 관한 생생하고 일관성있으며 신뢰할만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 10장: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

7-9장에서 다룬 것 처럼, 제자들이 부활했다고 믿었던 예수가 애초에 죽은 것이 아니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혹은 예수가 죽은 것은 맞지만 시신은 도난 당했거나,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거나 숨겨졌고 제자들과 사람들은 일종의 환상에 빠져서 헛것을 보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망상에 빠진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10장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조명하여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한다. 예수 세미나와 같은 예수의 신성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주축으로 부활이라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하고 예수의 죽음과, 빈 무덤, 다시 나타나여 보진 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기 되었다. 저자들은 이 모든 가설들이 하나같이 대다수의 학자들이 사실(fact)로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명한다.

– 11장: 구약의 모든 예언을 이룬 예수 –

예수 이 땅에 오시기 수백, 수천년전부터 기록된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에 대한 수백 개의 예언들이 기록되어있다. 이 예언들은 태어날 장소와 시간이나 계보, 출생방식 같이 인간이 억지로 끼워맞출 수 없는 내용들도 허다하기에 예수가 성경이 가리키는 참된 메시아인지 확인 또는 검증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구약에서 언급된 모든 예언을 성취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예언 중 단 8개만이라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은 100,000,000,000,000,000 분의 1이며 이것은 우연의 이름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낮은 확률이다. 이것은 예수가 성취한 구약성경의 예언들은 우연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감으로써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 12장: 정녕 예수 말고 다른 길은 없는가 –

12장에서는 ‘왜 굳이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그것은 결국 죄와 구원, 공의로우시면서도 자비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사이에 나타는 딜레마로 귀결된다. 저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왜 그런 극단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선택하셔야 했는지를 설명한다.

– 13장: 예수가 나의 삶을 변화 시켰다 –

마지막장인 13장에서는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간증이 담겨 있다. 쾌락에 빠져있었고 교만하기 짝이 없었던 저자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일어나기 시작한 삶의 변화에 대한 그의 간증은 간략하게 씌여져 있지만 마음에 감동을 주고 복음의 능력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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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자도
저자: 존 스토트
평점: 4/5

들어가며

이 책의 저자인 존 스토트는 필자가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다. 그가 20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였던만큼 긴 소개가 굳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다. 필자는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존 스토트의 저서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균형잡힌 기독교>, <현대 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동성애 논쟁>, <성령 세례와 충만>,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기독교의 기본진리>, <설교자란 무엇인가>, <존 스토트의 복음전도> 등으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다. 단일 저자로써는 아마도 CS 루이스 다음으로 가장 열심히 탐독했던 저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2011년 7월 어느 날 그가 향년 90세로 별세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을 때 영적 멘토 한분을 잃은 것 같은 큰 상실감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이 글에서 소개할 <제자도>는 존 스토트가 별세하기 2년전 88세의 나이에 집필한 그의 마지막 책이다. 이미 4년쯤전 읽었던 책이지만 제자도에 대해 다시금 묵상해볼 기회가 생겨서 다시 펼치게 되었다.

제자도는 성경에서, 특히 신약 성경에서 드러나는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곧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뜻이기에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제자도는 성경의 핵심 진리의 연장선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져야 할 세계관과 이 땅에서의 사명, 삶의 자세, 태도, 책임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기에 더욱 그렇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자도의 본질을 8가지 나누어서 설명한다. 특별히 생애 마지막에 죽음을 앞두고 집필한 책인 만큼, ‘의존'(7장)과 ‘죽음'(8장)이라는 맥락에서 제자도를 설명하는 그의 통찰은 탁월했고 진솔했으며 필자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도 유익한 내용들이 많이 있었으나 의존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글만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의존

제자도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갖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설명은 필자가 충분히 묵상해보지 않았던 제자도의 한 측면이었던 것 같다. 그의 친구라는 존 와이어트의 표현처럼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의존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또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두려움과 조급함에서 좀처럼 자유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누구를 온전히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언약을 의심하고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은 아브람의 모습을 통해 폭로된 인간의 연약한 본성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것이고, 인생이란 그런 불확실성 속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지혜와 경륜 속에서 의도하신 선한 계획을 신뢰하고 의존하는 연습을 하는 것 아닐까.  그리스도 또한 다른 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다른 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하는 모습으로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위엄에는 흠집이 나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미성숙의 표지라는 그의 말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써, 또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써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죽음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몇 가지 측면이 있다.

1. 육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

모든 사람은 죽는다. 이 세상에 죽지 않은 사람은 없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직면해야 할 문제이며,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이다. 한 사람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곧 삶의 의미, 목적, 가치 등을 포괄하는 그 사람의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다. 교수대 앞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라는 말을 남긴 본회퍼의 유명한 말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단순히 모든 것의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렇기에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박해를 받고 죽어나갔던 수많은 순교자들이 두려워하기는 커녕 영생을 누릴 기쁨과 감격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2. 죄에 대한 죽음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롬6:13)’라고 말한다. 여기서 ‘죽은 자’가 의미하는 바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의미이며 ‘다시 살아난 자’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에 죄에 대하여 죽지 않고서는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죽음과 구원을 연결지으면서도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명확하게 하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쉽다.

3. 자기부인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는 예수님의 말처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자아를 죽이는 자기부인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동반될 수 밖에 없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진정한 자기부인이 없다면 진정한 자기 발견,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제자도의 토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자기부인은 예수밖의 ‘나’의 상태가 ‘가망없음’임을 인정하고 철저히 낮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4. 선교

선교지에서는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난다. 또 선교의 현장에서는 고난과 박해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역설적이게도 그럴 때에 선교의 열매는 더 풍성하게 드러난다. 그렇기에 선교의 현장으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고난과 박해는 당연한 것이며, 담대함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축복이다. 그것은 죽음이 곧 열매를 맺는 길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짧은 시간안에 전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수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으로 감내한 고난과 박해 또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본받을 대상이 아닌 믿음의 대상

한 동안 왜 오늘날 거의 모든 설교는 우리의 행함과 예수님을 본받음, 성화와 같은 내용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이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그 또한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흠이 없으신 분이다. 그 분은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엄두조차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을 우리가 본받아 닮아가야 할 일종의 롤모델로 제시해 주신 것이 아니다. 기회만 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육신의 정욕과 내 가치만을 찾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 존재가 선악과 따먹고 타락한 우리 인간이 아니였던가. 인간은 애초에 예수님을 본받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이지 본받을 롤모델이 아니다.

‘예수님은 본받을 대상이 아닌 신앙의 대상이다’ 라는 다소 자극적일 수 있는 글을 썼더니 다년간 많은 분들이 성경구절들을 제시하시며 여러 지적을 해주셨다. 그 구절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자체가 잘못됬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예수를 사랑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도가 자연스레 변화되어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예수는 강단에서 백날 예수님 닮아라 외친다고 닮게 되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하면 더 예수님을 닮아서 온유하고 사랑스럽고 지혜로운 자가 될수 있을까를 고민한다고 예수님 닮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닮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성령충만한 것이다.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가슴 깊이 깨닫고 성령충만함을 받기위해서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매일 철저히 깨닫고 무너지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우선되어야한다.  오늘날 강단에서는 이런 과정이 많은 부분 생략 혹은 축소된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이유, 방법, 등에 대한 내용으로 메꿔지고 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은혜속에 젖어 변화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기도와 이끄심, 도우심 등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예수를 닮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백날해도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하고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자책을 하는가 하면, 눈꼽만큼의 성품의 변화가 보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것을 가지고 뿌듯해하며 자기가치를 챙기기에 급급하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휠체어를 의지하며 피를 토하듯 쏟아냈다는 생전 마지막 설교에서 이 부분을 강하게 이야기 하신 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엽고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김성수 목사님이 설교 때 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난다.

설교는 ‘여러분, 우리가 거룩한 삶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시다.’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들에 대한 소개와 그 아들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여야 하고 적용은 살아있어 운동력이 있는 그 말씀에 의해 일어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일을 하게 해야 인간의 자랑이 없는 것이지 말씀을 전하는 자가 그 적용부분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설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아들이 하신 일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 스스로가 그 복음의 대상 속으로 들어가 일을 합니다.

혹자는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된 후에 맺어야 할 열매, 행함에 대해서 자주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존 맥아더 목사님이 미국에서도 보수적이고 철저히 성경적이기로 소문이 난 그의 Grace Community Church의 교인의 상당수가 구원받지 못한 자들 일것이라고 말했던 것 만큼 구원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듯 하다. 강단에서는 지속적으로 회개의 촉구와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울려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Paul Washer 목사님도 가는 곳마다 그렇게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눈물까지 쏟아내며 청중들의 양심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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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기독교는 여러분과 저의 작은 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행햐느냐와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이전보다 얼마나 더 변화되고 나아졌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분의 흠없고 완전한 의가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분을 믿으면 그 분의 의가 여러분께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 분의 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니 중단하십시오 

이것들은 절대로 여러분을 그 어디로도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 멀리 가기전에 멈추십시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순간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가엽고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뿐입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를 만인이 본받아야 하는 아름다운 것으로 변질 시키지 마십시오 

 

John Lennox의 2012 베리타스 포럼 강연: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비이성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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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 대학의 수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존 레녹스 (John Lennox)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지성인 중 하나이다. 그는 박사 학위만 3개를 취득했고 그 중에 하나는 옥스포드 대학, 또 하나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취득했다. 또한 언어에도 탁월한 소질이 있어 4-5개정도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가히 천재라 불릴만한 인물이다. 그는 옥스포드에서 학부생으로 수학하던 시절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CS Lewis의 마지막 강의를 들었던 학생 중 한명이며, 그 자신도 현재 스티븐 호킹 (Stephen Hawking) 이나 피터 싱어 (Peter Singer) ,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와 같은 쟁쟁한 무신론자들에게 빈틈없는 논리로 기독교를 변호하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가이다.

필자도 2011년 캘리포니아 남가주대학 (USC) 캠퍼스에서 ‘Same evidence, different conclusions: Is “objective belief” an oxymoron?’ 이라는 주제로 있었던 베리타스 포럼 강연과 2014년 갈보리 채플 (Calvary Chapel) 에서 있었던 존 레녹스의 강연을 직접 들은 경험이 있다. 1945년생인 그는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며 언제나 위트가 넘쳐나는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는 힘이있는 인물이였음을 생생히 기억한다.

2012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비이성적인가? (‘Is belief in the supernatural irrational?’) 라는 주제로 베리타스 포럼이 주최하여 강연을 했다. 초자연 (supernatural)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시작으로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펼쳐나간다. 그는 또한 오늘날 저돌적인 신무신론자 (new atheists)들이 왜곡한 기독교의 입장들을 하나 하나 짚어가면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했고,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레녹스의 하버드 대학 강연의 중요한 포인트 몇가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이성적인 과학 vs 비이성적인 종교?

수 많은 과격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등에 업고 종교는 과학에 무지하고 객관적인 증거와 논리를 따질 줄 모르는 비이성적인 사람들만 믿는 체계라는 식으로 논쟁을 끌고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레녹스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훌륭한 과학자들을 언급하면서 이 논쟁은 종교 vs. 과학의 구도가 아니라 자연주의 (Naturalism) vs. 유신론 (Theism)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오히려 그는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맥스웰과 같은 현대과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위대한 과학자들이 신실한 신앙인이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며 역사적으로 유신론이야 말로 현대과학을 가능케 했던 사고체계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유신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그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하고 설명할 수 있는 질서정연한 법칙을 신이 자연세계에 부여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현대과학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레녹스는 더 나아가서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이 진리의 추구에 있어서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레녹스가 설명하는 논증이 소위 말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인  앨빈 플란팅가 (Alvin Plantinga)가 주창한 Evolutionary Argument Against Naturalism (EAAN) 이다. 이 논증은 사실 CS Lewis가 자신의 책 <기적>에서 이미 다룬 내용을 플란팅가가 좀 더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킨 것인데 계속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마음이 가장 하등한 동물에서 발전돼 나온 것이라면 그 마음에서 나온 대단한 결론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던 다윈에게 까지 올라가게 된다. 레녹스의 핵심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말하는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은 살아남기위해 생존에 가장 적합하게 진화하는 것이지 진리를 가장 잘 포착하는 형태로 진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 생물학의 큰 기둥인 신다윈주의 진화론은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매우 불편한 관계 또는 양립 불가능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플랜팅가의 EAAN 논증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이곳을 참조.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자들은 우주가 닫힌 체계 (closed-system)라고 말하며, 우주의 모든 것이 물리,화학적인 작용들로 환원된다고 설명하기 때문에, 모든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이론들과 수학공식들같은 비물리적인 것들 조차도 물리, 화학적인 작용들의 결과라고 주장해야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는 점을 레녹스는 잊지않고 강조한다.

자연세계는 닫힌 체계 (closed system)인가?

무신론자들은 종종 자연세계는 닫힌 체계이고, 자연은 이미 밝혀진 자연법칙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기때문에 기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이나,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사건같은 성경에 기록된 여러 기적들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레녹스는 매우 위트있게 설명해버린다. 금고에 1000불을 어제 한번, 또 오늘 한번 넣어놓고 내일 금고를 열었을 때 500불만 들어있다면 그것은 사칙연산법칙이 깨져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금고를 열고 훔쳐간 것임이 분명한 것과 같이, 우주안에서 부활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자연법칙이 깨진 것이 아니라, 우주를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우주밖에서 이러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조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 강연에서 가장 위트있는 비유가 아니였나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주장을 할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법칙을 무너뜨리는 어떤 다른 자연적인 방법으로 부활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밖에서 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조정했다는 레녹스의 설명은 기적에 대한 많은 오해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설명인 듯 하다.

과학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20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철학자였던 버트란트 러셀 (Bertrand Russell)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과학이 알려줄 수 없는 것은 인류가 알 수 없다’. 과학만이 지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러셀은 자신이 한 이 주장이 과학적 주장이 아님을 생각하지 못했고, 망신살 뻗칠만한 논리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러셀보다는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답할 수 없는 과학의 한계를 인식해야한다’고 말한 노벨상 수상자 피터 메다와 (Sir Peter Medawar) 의 말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일 것이다.

매케니즘과 에이전트

레녹스가 강조하는 내용 중에 또 하나는 메케니즘과 에이전트는 다르며 각각 별개의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포드 자동차를 설명하기 위해선 엔진의 작동원리와 같은 메케니즘을 다루는 설명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이 메커니즘을 설계한 헨리포드라는 사람을 설명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말은 결국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여 예전에는 설명될 수 없었던 자연현상들 (메케니즘)이 설명가능하게 되어진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그 자연현상들을 설계했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 (에이전트)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레녹스가 2008 년에 옥스포드 대학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리처드 도킨스와 벌였던 논쟁에서도 줄기차게 설명했던 부분이다.

십자가

문을 열다

우리가 십자가를 얼마나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흔히 부르는 찬양 속에 나오는 십자가라는 단어를 근대적 처형법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로 바꾸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교수대 교수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오 너의 슬픈 세상 눈물 너의 쌓인 아픔을
사형대 앞에 너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교도소의 길을 걷는 자에게

예수 당시의 십자가가 권력에 대항한 정치범들이 겪는 처형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개사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바뀐 가사에 강한 거부감과 불쾌감, 또는 기괴함을 느낀다. 심지어는 거룩한 찬양이 모독당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우리가 십자가를 달콤하고 평온한 사랑과 은혜의 상징으로만 상상하고, 십자가가 원래 뜻하던 죽음과 고통, 오욕과 공포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감옥과 사형대는 악랄하고 더러운 범죄자들을 위한 것이지, 거룩한 신앙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말한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수모와 고통이 우리에게는 승리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상징하는 잔혹한 폭력과 죽음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대신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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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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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저자: 김성수
평점: 4/5

간략한 소개
이 책은 남가주 서머나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는 김성수 목사의 첫번째 강해집이다. 서울대 출신으로 80년대 대학생 시절 운동권에서 활동하다 구치소에도 수감된 적이 있고, 졸업후에는 정당에도 잠시 몸을 담았던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임을 미리 기억해 두면 처음엔 다소 과격하게 다가올 수 있는 그의 설교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저자는 “비 오던 날”이라는 자작곡으로 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 수많은 연예계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도미하여 신학 공부를 하는 중에 한동안 찬양 사역자로도 왕성히 활동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2004년 당시 LA의 한 대형교회 부목사로 섬기다가 나와 10명의 청년들과 교회를 개척하여 1년여간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만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 원고를 모아 편집한 것이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라는 책으로 출판이 되었다. 베스트셀러 반열에는 근접도 못할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끈 책은 아니지만, 일개 이민 개척교회 무명목사의 딱딱할 수 밖에 없는 기독교 교리 강해집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 책이 나름의 화제를 일으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가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는 남가주 서머나교회 웹사이트에 매주 올라오는 그의 설교가 매주 꾸준히 2~3만건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사실, 남서울교회와 삼일교회에의 담임목사자리가 공석이였을 때 청빙을 받았으나 거절한 적이 있는 점을 보아도 그는 실제 알려진 것보다 은근히 지명도 높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필자도 처음에 이 책을 반신반의 하면서 집어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기존의 여러 설교집, 교리집 등을 접해봤고 그들에게서 별다른 다른 점들이 없다고 느꼈었기 때문에 그저 또 지루하고 식상한 그런 교리 강단이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한편 한편의 저자의 설교에서 볼수 있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성경본문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정밀함을 통해서 신선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무엇이 다른가?
성경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이해, 풍부한 경험, 체험에 기반한 현 한국 기독교의 정확한 진단, 기복주의, 물질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 성공주의에 물든 현대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진심어린 충고,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면서도 완변한 완급조절을 보이는 전달력, 표현력, 추상적인 개념의 시각화, 확신에 찬 문체, 성경전체를 하나의 큰 틀에서 보고 하나의 대서사시로 묶어서 풀어내는 타고난 저자만의 능력 등은 장장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설교집을 읽는데에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독교의 본질이 왜곡되고 교회가 부패하여 그 중심에서 부터 흔들리고 있는 있유가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기 때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목사들에 의해 잘못 가르쳐지고 받아들여졌던 기독교의 진리들을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다시 바르게 제시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지가 올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동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 자신이 왕이 되고자 정신없이 달려가는 인간들에게 그들은 모두 가짜라고 선포해버린다. 그런 기독교는 없다라고 못 박아버린다. 오히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정반대의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흔히 기복주의, 물질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 성공주의 등에 물든 한국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저자의 설교를 들여다 보면 그가 맹목적으로 그런 비판을 쏟아내는 설교가가 아닌 것임을 바로 알게된다. 한국 기독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논리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성경을 그저 도덕, 윤리를 가르치는 책, 혹은 이 땅에서 성공, 부, 복 등을 이뤄내는 법칙이나 방법을 담고있는 책 정도로 밖에 보지 않는 목사들이 내어놓는 무수한 설교들을 가차없이 쓰레기 취급해버린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치고 있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그가 풀어내는 성경의 메세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성경 어느 구절을 가지고서라도 문맥적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하나님의 나라로  자연스럽게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는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의 한 부분만을 취해 억지스럽게 끼워맞추는 식의 어이없는 설교만 늘어놓는 목회자들을 분노하게 한다. 실제로 저자의 이런 강한 메세지에 대한 반감을 가진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저자의 설교 한편 한편이 나올 때마다  공공연히 그를 비판을 해왔으며, 저자가 섬기는 교회에까지 찾아와 직/간접적인 살해협박까지도 서슴치 않았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목회자들부터가 얼마나 그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다. 한편의 설교를 위해 십수권의 자기계발 서적을 끄적이는 그들에 반해 본문의 의미를 성경전체의 틀에서 해석하기 위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훑으며, 관련 신학서적과 설교, 신학 논문들까지도 참고하는 저자의 정밀성과 열정에서 나오는 설교의 깊이가 왜 다를 수 밖에 없으며 그들의  피상적이고 유치하며, 비성경적이기까지 한 설교를 자연스럽게 폭로하게되는지를 설명해주지 않나 생각된다.

특별히 눈 여겨 볼 주제들:
교회:
저자는 32장부터 44장까지 무려 200여 페이지를 할애하여 교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 만큼 저자는 교회의 본질과 의미, 그리고 역할의 중요성이 어떤 것이며, 그것들이 오늘날 어떻게 왜곡되고 변질되었는지, 이 시대의 교회가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 하나하나 짚어내어 조목조목 잘 설명하고 있다.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개념은 참으로 어려운 개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니 그냥 그런줄 알고 믿기만 하면된다라는 식의 무성의한 답변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일이 대부분이고 누구하나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목회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이것을 가지고 충분히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자신의 양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그 신비한 방식에 대해 물어왔을 때 만족스러운 답변을 해주고 싶어서 지혜를 구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십일조 해서 복 받으라는 식의 설교를 잘할까 하는 고민만 해서 그런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저자의 통찰이 담긴 설명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헌금:
헌금에 대한 설교를 이런 식으로 하는 설교자는 난생 처음 접해봤다.  “하나님의 주실 축복을 믿고 바라며 하는 헌금/십일조는 하나님이 10배, 100배로 갚아주신다” 혹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재앙이 온다/하나님이 다른방식으로 거두어가신다” 식의 맹목적인 물질의 헌신을 요구하는 설교에 익숙해진 한국교인들은 딜레마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금을 하자니 아깝고, 내지 않으려니 왠지 나쁜일 생길 것 같아서 찝찝하고. 아마 헌금보다 한국 교회의 기복주의를 더 잘 대표하는 예는 없는 듯하다. 헌금은 내가 드린 물질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확신이 없으면 할 필요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또 한국 교회(특히 대형교회)에는 사람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바쳐진 헌금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으니 최대한 많은 헌금을 걷어들이고 말겠다는 정신도 많이 퍼져있다. 성공주의를 조장하는 설교로 정평이 난 한때 청년만 2만명이 넘게 모였다는 삼일교회 전병욱이 목사가 2010년 LA에서 있었던 어느 집회에서 설교 중에서 이런 말을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이 하는 것을 직접 듣고 까무러칠 뻔한 적이 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배우자를 찾아 결혼하는 일이 많은데, 자매들이 배우자를 찾을 때 믿음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둘 다 중요하게 본다. 우리교회는 교인들이 내는 십일조 내역(액수와 낸 날짜)을 공개하기 때문에 형제들이 눈물을 머금고 10의 3조 또는 10의 4조를 하기도 한다. “

목사가 설교 중에 한말이 맞을까 싶을정도로 어이없는 이 발언에 대한 씁쓸함을 강하게 나타내며 집회가 열렸던 교회의 청년부 목사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그가 내놓은 대답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어차피 인간은 100%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께 물질을 바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약간의 강제적인 분위기를 통해서라도 헌금하여 그로 인해 돌아오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이런 분위기에 정면으로 반하는 메세지를 전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로 드릴 수 있는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제발 헌금 하지말라는 것이다. 헌금 때문에 고민하고 시험드는 분들을 위해 추천한다.

성령:
저자는 성령을 설명하기 위해서 3장을 할애한다. 기적, 치유, 방언, 은사 등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성령이 올바로 설명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과연 누구인지,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성령충만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령훼방이란 과연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인지 등의 이론적이고도 실질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 도출해낸다.

아쉬운 점
이 책은 조직신학 서적도 아니고 당연히 모든 주제를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구원에 대한 설교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구원만큼 중요한 교리도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원만큼 왜곡되고 논란이 많은 교리도 드물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이신칭의와 같은 개념의 정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흔히 많이 강조되는 성화와 같은 개념에 대한 그의 견해와 설명이 없었다. 오타도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출판사의 작업이 허술하다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차례 
1장: 인간과 죄(I)
2장: 인간과 죄(II)
3장: 신령과 진리의 예배
4장: 세례
5장: 성경
6장: 헌금
7장: 안식일과 주일
8장: 삼위일체
9장: 성령(I)
10장: 성령(II) 성령세례
11장: 성령(III) 성령충만
12장: 성령(IV) 성령훼방
13장: 기적
14장: 신비주의와 기복주의
15장: 구약과 신약
16장: 은혜
17장: 믿음
18장: 캘빈주의와 오대 강령으로 본 하나님의 사랑
19장: 성찬이란 무엇인가?
20장: 외식이란 무엇인가?
21장: 기도
22장: 주기도문(I)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23장: 주기도문(II)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4장: 주기도문(III)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5장: 주기도문(IV)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26장: 주기도문(V)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27장: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
28장: 그리스도인의 고난(I) 고통 없는 지옥
29장: 그리스도인의 고난(II) 피할길은 있는가?
30장: 그리스도인의 고난(III) 상처와 가계에 흐르는 저주?
31장: 죽음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삶
32장: 교회(I) 교회란 무엇인가?
33장: 교회(II) 교회와 치리
34장: 교회(III)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35장: 교회(IV) 교회의 본무 (1) 교회, 거룩을 향하여 가는 자들
36장: 교회(V) 교회의 본무 (2) 교회,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들
37장: 교회(VI) 교회의 본무 (3)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사람들
38장: 교회(VII) 교회와 목사
39장: 교회(VIII) 교회, 오직 예수로만 위로 삼는 자들
40장: 교회(IX) 교회와 복음
41장: 교회(X) 사랑의 공동체
42장: 교회(XI) 온전함을 향하여 온전케 되어지는 교회
43장: 교회(XII) 교회와 직분
44장: 교회(XIII) 교회!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크리스천 철학자 & 과학자

대다수의 영향력있는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비기독교인 혹은 무신론자들이였다고 많이 생각들한다. 하지만 한 세대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은 대부분 무신론자였다는 식의 통념은 사실 편견에 쌓인, 아니 무지하기까지 한 생각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이나 버트란드 러셀과 같은 유명한 비기독교인 과학자/철학자도 있지만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살펴보면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1. 기독교인 철학자
사실 중세시대 때까지만 해도 영향력있는 철학자들은 대부분 카톨릭 신부, 신학자들이였다. 그 시대는 신학이 곧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7세기에 들어 계몽주의가 유럽에서 급부상하면서 이런 분위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기독교 철학자들은 발 딛고 설 자리도 없을만큼 초라한 모습이였고 니체나 마르크스, 프로이드, 러셀 등과 같은 무신론 사상을 기반으로 한 철학자들이 판을 쳤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철학자 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알빈 플란팅가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같이 이 세대를 대표하는 거물급 철학자가 기독교 진영에서 배출되면서 “기독교 철학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심심풀이로 한글자막을 달아본 아래 동영상을 참조하라. 기독교 진영의 최고의 논객으로 평가받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바이올라 대학의 윌리엄 레인 크레그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 분과의 공개토론을 두려워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 기독교인 과학자
아래에는 과학에서 하나의 분야를 창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 중 창조론을 지지하는 기독교인들만 모아서 정리해 놓은 것이다.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라는 창조론을 지지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로부터 얻은 자료이니 그들이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들 너무나도 유명한 과학자들이지만 비전공자들도 알만한 인문들로는 루이 파스퇴르, 아이작 뉴턴, 요한 케플러, 멕스웰, 앙리 파브르, 멘델, 파스칼, 켈빈, 파라데이 등이 있다.

 SCIENTIFIC DISCIPLINES ESTABLISHED BY CREATIONIST SCIENTISTS

                   DISCIPLINE                                SCIENTIST

ANTISEPTIC SURGERY                         JOSEPH LISTER (1827-1912)
BACTERIOLOGY                                  LOUIS PASTEUR (1822-1895)
CALCULUS                                         ISAAC NEWTON (1642-1727)
CELESTIAL MECHANICS                      JOHANN KEPLER (1571-1630)
CHEMISTRY                                        ROBERT BOYLE (1627-1691)
COMPARATIVE ANATOMY                 GEORGES CUVIER (1769-1832)
COMPUTER SCIENCE                         CHARLES BABBAGE (1792-1871)
DIMENSIONAL ANALYSIS                   LORD RAYLEIGH (1842-1919)
DYNAMICS                                        ISAAC NEWTON (1642-1727)
ELECTRONICS                                   JOHN AMBROSE FLEMING (1849-1945)
ELECTRODYNAMICS                           JAMES CLERK MAXWELL (1831-1879)
ELECTRO-MAGNETICS                      MICHAEL FARADAY (1791-1867)
ENERGETICS                                     LORD KELVIN (1824-1907)
ENTOMOLOGY OF LIVING INSECTS    HENRI FABRE (1823-1915)
FIELD THEORY                                  MICHAEL FARADAY (1791-1867)
FLUID MECHANICS                            GEORGE STOKES (1819-1903)
GALACTIC ASTRONOMY                    WILLIAM HERSCHEL (1738-1822)
GAS DYNAMICS                                 ROBERT BOYLE (1627-1691)
GENETICS                                         GREGOR MENDEL (1822-1884)
GLACIAL GEOLOGY                           LOUIS AGASSIZ (1807-1873)
GYNECOLOGY                                   JAMES SIMPSON (1811-1870)
HYDRAULICS                                     LEONARDO DA VINCI (1452-1519)
HYDROGRAPHY                                 MATTHEW MAURY (1806-1873)
HYDROSTATICS                                 BLAISE PASCAL (1623-1662)
ICHTHYOLOGY                                  LOUIS AGASSIZ (1807-1873)
ISOTOPIC CHEMISTRY                        WILLIAM RAMSAY (1852-1916)
MODEL ANALYSIS                              LORD RAYLEIGH (1842-1919)
NATURAL HISTORY                            JOHN RAY (1627-1705)
NON-EUCLIDEAN GEOMETRY             BERNHARD RIEMANN (1826- 1866)
OCEANOGRAPHY                               MATTHEW MAURY (1806-1873)
OPTICAL MINERALOGY                       DAVID BREWSTER (1781-1868)
PALEONTOLOGY                                JOHN WOODWARD (1665-1728)
PATHOLOGY                                      RUDOLPH VIRCHOW (1821-1902)
PHYSICAL ASTRONOMY                      JOHANN KEPLER (1571-1630)
REVERSIBLE THERMODYNAMICS          JAMES JOULE (1818-1889)
STATISTICAL THERMODYNAMICS        JAMES CLERK MAXWELL (1831-1879)
STRATIGRAPHY                                  NICHOLAS STENO (1631-1686)
SYSTEMATIC BIOLOGY                        CAROLUS LINNAEUS (1707-1778)
THERMODYNAMICS                            LORD KELVIN (1824-1907)
THERMOKINETICS                               HUMPHREY DAVY (1778-1829)
VERTEBRATE PALEONTOLOGY             GEORGES CUVIER (1769-1832)

위대한 발명/발견 등을 이루어낸 기독교인 과학자들도 있다:

NOTABLE INVENTIONS, DISCOVERIES OR DEVELOPMENTS BY CREATIONIST SCIENTISTS
           CONTRIBUTION                                     SCIENTIST
ABSOLUTE TEMPERATURE SCALE                   LORD KELVIN (1824-1907)
ACTUARIAL TABLES                                      CHARLES BABBAGE (1792-1871)
BAROMETER                                                 BLAISE PASCAL (1623-1662)
BIOGENESIS LAW                                          LOUIS PASTEUR (1822-1895)
CALCULATING MACHINE                              CHARLES BABBAGE (1792-1871)
CHLOROFORM                                             JAMES SIMPSON (1811-1870)
CLASSIFICATION SYSTEM                             CAROLUS LINNAEUS (1707-1778)
DOUBLE STARS                                            WILLIAM HERSCHEL (1738-1822)
ELECTRIC GENERATOR                                 MICHAEL FARADAY (1791-1867)
ELECTRIC MOTOR                                        JOSEPH HENRY (1797-1878)
EPHEMERIS TABLES                                      JOHANN KEPLER (1571-1630)
FERMENTATION CONTROL                           LOUIS PASTEUR (1822-1895)
GALVANOMETER                                         JOSEPH HENRY (1797-1878)
GLOBAL STAR CATALOG                             JOHN HERSCHEL (1792-1871)
INERT GASES                                               WILLIAM RAMSAY (1852-1916)
KALEIDOSCOPE                                           DAVID BREWSTER (1781-1868)
LAW OF GRAVITY                                        ISAAC NEWTON (1642-1727)
MINE SAFETY LAMP                                     HUMPHREY DAVY (1778-1829)
PASTEURIZATION                                        LOUIS PASTEUR (1822-1895)
REFLECTING TELESCOPE                              ISAAC NEWTON (1642-1727)
SCIENTIFIC METHOD                                    FRANCIS BACON (1561-1626)
SELF-INDUCTION                                        JOSEPH HENRY (1797-1878)
TELEGRAPH                                                 SAMUEL F.B. MORSE (1791-1872)
THERMIONIC VALVE                                    AMBROSE FLEMING (1849-1945)
TRANS-ATLANTIC CABLE                            LORD KELVIN (1824-1907)
VACCINATION & IMMUNIZATION                 LOUIS PASTEUR (1822-1895)

더 많은 인물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하라.

SDG 개혁신앙 연구회 추천 도서

SDG 개혁신앙 연구회 추천 도서
-성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

■ 기독교 고전
신의 도성/ 자유의지론/ 참회록 / 삼위일체 / 시간과 영원 / 어거스틴
기독교 초기 교부 작품
기독교 강요 / 설교 / 서신들 / 존 칼빈
종교개혁 3대 논문 / 설교 / 루터
사무엘 러더포드의 서한집 / 사무엘 러더포드
그리스도를 본받아 / 토마스 아켐퍼스
신학의 체계 / 토마스 왓슨
천로역정 / 존 번연
신앙과 정서 / 조나단 에드워즈
영적 사고방식 / 존 오웬
인간의 전적타락 / 아더 핑크
팡세 / 파스칼
■ 신앙고백서 및 교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 박윤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 A. A 핫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 R. C 스프로울
장로교인이 믿는 신조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현대적 해설 / 클락, 고든 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 G. I 윌리암슨
성경 소요리문답해설 / 토마스 빈센트
개혁주의 신앙백서 : 소요리문답강해 제1-107문 / G. I 윌리암슨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 고려서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ⅠⅡ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해설서 / 김은수
소요리문답 강해 / 최낙재
기독교 교리강론 / 토마스 카트라이트
52주 완성 소요리문답 / 정기화
(만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 백금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강해 / 김헌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강해 / 이승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 G.I 윌리암스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시리즈 / 마틴 로이드 존스
세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 이형기
교리를 알면 신앙이 자란다 / 최병규

■ 교의학 & 조직신학
개혁교의학개요 / 하나님의 큰 일 / 헤르만 바빙크
교의학개론 / 핸드리쿠스 베르코프
종교개혁후 개혁주의 교의학 / 리차드 A. 뮐러
개혁파 정통 교의학 / 하인리히 헤페
개혁교의학 / 유해무
교의학 서론 / 신복윤
조직신학 / 루이스 벌콥
조직신학 / 존 머레이
조직신학 / 찰스 핫지
최신 조직신학 / 로버트 레이몬드 L
조직신학 편람 / 김영규
조직신학 서론 / 개혁주의 변증학 / 코넬리우스 반틸
개혁주의 속죄론 / 프란시스 튜레틴
구원의 계획 / 벤자민 B. 워필드
알기쉬운 예정론 / R. C 스프로울

■ 칼빈주의 & 개혁신앙
칼빈주의 5대 교리 / 에드윈 h. 팔마
칼빈주의 강연 / 칼빈주의 / 하나님께 가까이 / 아브라함 카이퍼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들 / 신복윤
개혁파신앙이란 무엇인가 / 마키다 요시카즈
개혁주의 신학연구 / 로레인 뵈트너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총서 시리즈 / 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 / 김영규
개혁신앙 강좌 시리즈(10) / 성약출판사
칼빈주의 / 조엘 비키
개혁신학의 광맥, 개혁신학의 정수, 개혁신학의 전망 / 김재성
개혁신앙과 현대사상 / 코넬리우스 반틸
전환기의 개혁신학 / 이승구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D 스틸, C 토마스
종교개혁과 개혁신앙 / 로버트 갓프리 외
개혁신앙으로 돌아가라 / 김홍만
개혁신앙시리즈 / 생명의 말씀사
칼빈과 개혁신앙 / 김은수
21C 세계관과 개혁신앙 / 김영한
존 맥아더의 솔라 시리즈 / 존 맥아더
개혁 그리스도인과 신앙고백의 특징 / J. 캄파위스
코람데오 시리즈 / 복있는 사람

■ 청교도
개혁주의 청교도 영성 :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보여 주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 연구 / 조엘 비키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 로이드 존스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 현대인을 위한 청교도 신앙 연구 / 존 오웬
개혁주의 청교도 영성 / 청교도 전도 : 성경적 접근 / 조엘 비키
청교도 작품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 / 돈 키슬러
청교도 이야기 : 교회사를 빛낸 영적 거장들의 발자취 / 오덕교
청교도 언약사상 : 개혁운동의 힘 / 원종천
청교도의 소망 : 부흥과 세계 선교를 향한 청교도의 열정 / 이안 머리
(청교도의 황태자)죤 오웬 / 앤드류 톰슨
그리스도의 영광 / 죄 죽임 /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 / 성찬 설교 / 존 오웬
죽임당한 어린양 / 거듭남의 본질 / 스테판 차녹
십자가 아래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상한 심령으로 서라 / 경외함의 진수 / 존 번연
신학의 정수 / 윌리암 에임스
유사 그리스도인 / 매튜 미드
영광스러운 부르심 / 리챠드 십스
확신,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 토마스 브룩스
산상수훈 / 십계명 / 주기도문 해설 / 묵상 / 토마스 왓슨
돌이켜 회개하라/ 회개의 참된 의미 / 조셉 얼라인
회심 / 참된 목자 / 리차드 백스터
성령론 / 신앙 감정론 /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 놀라운 회심 이야기 / 조나단 에드워즈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 / 칭의 교리의 진수 / 제임스 뷰캐넌
하나님의 주권 / 성경은 언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가 / 당신은 진짜 거듭났는가 : 당신의 거듭남의 진실성 여부를 확증해줄 진단서 / 하나님의 언약 / 구원의 교리 / 아더 핑크
목회자 후보생에게 / 목회자들을 위하여 / 설교, 강해 / 스펄젼
거룩 / 구원의 확신 / J. C 라일

■ 기독교 역사 및 역사 신학
서양기독교역사 / 얼 E. 케인즈
기독교 교회사 / 한국기독교의 재인식 / 김영재
한국 장로교회사 / 양낙흥
한국 장로교 신학사상 / 현대신학 해설 / 간하배(Conn, Havie M)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앙 / 서창원
종교개혁 전야 / 한국 교회친일파 전통 /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 최덕성
종교개혁사 / 베인턴 롤란스
종교개혁사 / 오덕교
개혁교회사 / 주도홍
핵심요해 교회사 가이드 / 심창섭, 박상봉
미국, 캐나다 기독교 역사 / 마크 A. 놀
중세교회사 / 라은성
20세기 신학 / 스텐리 그랜츠
현대교회문제 / 김효성
기독교와 자유주의 / 기독교와 현대사상 / 그레샴 메이쳔
(교회사 안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 / 해롤드 O.J 브라운
개혁주의 시리즈(남부개혁주의 전통과 신정통신학 등) / 데이비드 웰스
프란시스 쉐퍼 전집 / 프란시스 쉐퍼
박윤선의 개혁신앙 연구 / 장동민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 박용규
포스트모던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 / 마크 놀, 데이비드 웰즈
근본주의와 미국 문화 /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 조지 마스든
믿음의 거장 시리즈 / 넥서스CROSS

■ 올바른 기독교적 안목과 통찰을 제공하는 책들
데이비드 웰즈 4부작(신학실종 / 거룩하신 하나님 / 윤리 실종 / 위대하신 그리스도) 시리즈 / 데이비드 웰즈
마이클 호튼 시리즈(세상의 포로된 교회 /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 언약신학 / 기독교적 세계관 / 복음이 이끄는 교회 / 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 보는 기독교 핵심 /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 /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 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 / 마이클 호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 / 무질서한 은사주의 / 분별력 / 진리 전쟁 / 구원이란 무엇인가 / 존 맥아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 / J. I 패커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 / 삶을 허비하지 말라 / 진리의 영웅들 / 존 파이퍼
분열된 복음주의 /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 부흥과 부흥주의 / 오래된 복음주의 / 이안 머리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 / 조엘 비키
심리학,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옥성호
삶을 아는 지식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나를 깨운다 / 싱클레어 퍼거슨
부흥 / 성경적 찬양 / 타협할 수 없는 진리 / 로이드 존스
나를 따르라 / 본 회퍼
신앙클리닉 / 믿음의 본질 / 평신도를 위한 신학 입문 / 박영선
개혁해가는 교회 / 잘 다스리는 장로 / 허순길
기적은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 / 리처드 개핀
잘못된 기독교 분별시리즈 / 부흥과 개혁사

■ 가정
하나님의 방식으로 자녀 키우기 / 존 맥아더
언약자손으로 양육하라 / 가정예배(모범) / 조엘 비키
결혼신학 / 존 파이퍼
가족 / 로이드 존스
혼인 가정과 교회 / 김홍전
이혼 / 데이비드 엥겔스마

■ (출판 서적 중에) 꼭 읽어야 할 믿음의 위인전
마틴 루터
존 칼빈
존 낙스
츠빙글리
블링거
사무엘 러더포드
존 번연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찰스 스펄전
로이드 존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헨리 마틴
로버트 맥체인
메이첸
박윤선
주기철

■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되는 주석 및 강해(설교)집
칼빈의 성경 주석 및 설교
루터의 성경 주석 및 설교
윌리암 헨드릭슨 주석
매튜 헨리 주석
김홍전 목사 성경 강해
스펄젼 성경 강해
아더 핑크 성경 강해
로이드 존스 성경 강해

God-shaped Vac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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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a God-shaped vacuum in the heart of every man which cannot be filled by any created thing, but only by God, the Creator, made known through Jesus.

인간의 마음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한 빈 공간(God-shaped vacuum)이 존재한다.

-Blaise Pascal, Pensees –

Contac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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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개봉했던 Contact 이라는 영화를 오늘에서야 봤다. 15년 이상 지난 영화이지만 오늘날 더욱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많은 것을 시사하는 영화다.

몇가지 포인트:

1. 고통의 문제
고통은 민감한 문제다. 예나 지금이나 고통의 문제만큼 인간의 영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제는 없을 것이다. 주인공 엘리로 등장하는 조디 포스터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심근경색으로 잃게된다.  그녀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를 위로해주기 위하여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거네며 다가온 한 성직자에게 던지는 그녀의 회의적인 말투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반영한 것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아픔이 그녀에게 무신론적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무신론자들이 National Academy of Science의 멤버의 95% 이상이 무신론자이니 하는 통계를 들이대며 과학적 이해와 통찰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필연적으로 무신론적 세계관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논증을 하곤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연구를 보면, 자신을 무신론자로 분류하는 이런 탁월한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과학적 연구로 인해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미 견고한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들의 과학적 연구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한다.

2. 과학과 초자연적인 경험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지침중에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이라는 것이 있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더 간단명료한 쪽을 선택해야한다는 것이 오컴의 면도날의 원리이다. 즉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신론자이자 탁월한 과학자로 나오는 엘리는 이 영화에서 Occam’s Razor를 들이대며 신이 존재하지만 인류에게 자신의 흔적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설명과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인류가 만들어 냈다는 설명 중 어느 것이 더 간단한 설명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관찰가능한 증거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과학자인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신의 존재를 가르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영상참조).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위해선 (과학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는 엘리에 대한 팔머(Matthew McConaughey) 의 반응이 인상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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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머: Did you love your father? 아버지를 사랑했나요?
엘리: Yes. Very much. 네. 아주 많이요.
팔머: Prove it. 증명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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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머의 전략은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 윌리엄 레인 크레그(William Lane Craig)가 과학만이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순진한 사상을 옹호하는 옥스포드의 화학자 피터 앳킨스 (Peter Atkins)에게 과학이 증명할 수 없는 최소 다섯가지를 제시하며 그를 벙찌게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상참조)

1. Logical and mathematical truths (논리와 수학적 진리)
2. Metaphysical truths (형이상학적 진리)
3. Ethical values (가치에 관한 진술)
4. Aesthetic judgments (미학적인 판단)
5. Science itself (과학 그 자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법정에 앉아 자신이 들이댔던 Occam’s Razor의 논리로 공격받는 상황이 온다. 실재였던 경험들에 대한 그녀의 진술들이 과학적인 증거의 부재로 반박당하게 되고, 그녀가 일종의 일시적인 환상에 빠져있었다는 설명이 더 Occam’s Razor의 원리에 더 충실하기에 더 설득력이 있다는 말까지 나온게된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이 겪은 경험들을 증명할 수 있는 물리적인 증거를 하나도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과 자신의 모든 경험들이 일종의 환각 상태에서 일어났을 가능성, 자신도 다른 누군가가 그런 주장들을 했다면 똑같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내렸을 것이라는 점 등을 모두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이 실재였다는 사실에 조금도 의심이 없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만이 보고 들은 것들과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변론한다 (영상참조)

이 장면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앞에서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전 우주를 주관하시는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나누어 본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공감할만 한 부분이다. 과학은 절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없다. 과학이라는 학문의 탐구 영역은 물리적 법칙 아래있는 자연세계이지만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즉 그 모든 물리적 법칙들을 뛰어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은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에 의존하는 과학적 탐구방법은 성격상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가 던지는 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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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like you are saying science killed God. What if science simply revealed that He never existed in the first place?”

“당신은 과학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말하는 거에요. 만약 과학이 하나님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밝혀낸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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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해낸다는 발상은 사실 과학의 한계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 줄 뿐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만능주의에 빠져 과학이 이런 작업까지도 수행해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3. 도덕적 가치

영화 속에서 엘리는 “Would you consider yourself a spiritual person?” 이라는 질문에 “I consider myself a moral person.”이라는 동문서답을 한다. 이 질문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영혼,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자신은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쌩뚱맞은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상하다.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부재를 전제한다면 엘리는 어떤 기준으로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의 세계관에 의하면 도덕이란 결국 약육강식의 원리 속에서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일련의 사회적 규범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