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 (변증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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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
저자: 조쉬 맥도웰 & 션 맥도웰
평점: 4/5

– 간략한 소개 –

전세계적으로 기독교 신앙 서적치고는 경이로울 만한 숫자인 1500 만부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준 책으로 자리매김을 한 책인 조쉬 맥도웰의  <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 (원제: More than a carpenter) >>는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서는 크게 관심을 끌진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일반 대중을 겨냥한 변증 입문서 정도에 해당하는 책이기 때문에, 술술 쉽게 읽히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그 어느 것도 결코 대충 읽어넘길 만한 것이 없을만큼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 영적인 고민을 하며 진리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길 원하는 영적 구도자,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적인 회의주의자, 무신론자들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기독교 신앙에 관한 정직한 의심, 의문점들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유익한 책이다. 이 글에서는 이 책의 각 장별로 요약과 함께 간략한 서평을 남기고자 한다.

– 1장: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영혼 안에는 행복과 의미 있는 삶을 향한 목마름이 있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행복과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1) 나는 누구인가? 2) 내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3)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 기독교 또한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의 삶 속에서 이 세 질문에 대한 독창적인 대답을 내어놓고 있다. 저자들은 이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이 과연 신빙성이 있는지, 진리인지를 이 책에서 탐구하고자 한다.

– 2장: 성육하신 하나님 –

2장에서는 이 땅에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신적 자의식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탐구를 한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였다는 담대한 주장을 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 사람들이 부처나 무하마드나 공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만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은 매우 배타적이며 편협하고 옹졸하게 보인다며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를 따르는 많은 크리스천들을 핍박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던져야 할 정말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이 정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가?” 이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만약 ‘그렇다’라면 문제의 쟁점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은 참인가?” 이 될것이다. 신약성경을 얼핏 읽다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한번도 직접적으로 한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신약성경 여러 곳을 인용하며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명백하게 언급하셨다고 설명을 한다. 예를 들면:

1 )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5:18)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써서 언급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좀 더 사적인 표현을 썼고, 또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를 동등선상에 두었다.

2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라는 단어는 본질 또는 속성에 있어서 하나임을 뜻하는 표현으로써,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3 )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요 8:19) 4 )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요 12:45) 5 )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3) 6 )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요 5:23)

3 )-6 ) 모두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셨음을 보여준다.

7 )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여기서는 제 3자인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을 함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생각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8 )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막 14:60-62)

이 본문에서 나오는 ‘인자’라는 표현은 다니엘서 7장 13-14절에 나온 표현을 예수님께서 인용한 것이며,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성모독죄를 범했다며 분노했다는 기록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3장: 당신은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던 그 파격적인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3장에서는 저자들이 예수님이 했던 이러한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옥스포드에서 가르쳤던 CS 루이스가 예수님에 대해서 했던 유명한 말이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 사람들은 자주 예수에 관해서 어리석은 이야기들을 한다. 나는 그와 같은 일을 막으려고 이 자리에 서 있다.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선생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그의 주장을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단순히 인간에 지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예수가 말한 것과 같은 말들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 선생이 될 수 없다. 그는 미치광이이거나 혹은 지옥의 악마일 것이다. 당신은 선택해야만 한다. 이 사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미친 사람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형편없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취급해서 입을 다물게 하거나, 그를 악마로 여겨 그에게 침을 뱉으며 죽일 수도 있다. 혹은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위대한 스승으로 추켜세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자. 그는 우리에게 그런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

CS 루이스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하여 삼자택일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저 위대한 위인 중 한명정도로 취급하며 대충 대충 넘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파격적인 주장을 한 예수님은 망상에 빠진 정신나간 미치광이이거나,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악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진리만을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했던 주장들은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 예수님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예수님은 거짓말을 했거나,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런 주장을 한 정신병자 정도일 것이다.

– 예수는 거짓말쟁이인가? – 예수님이 고의로 거짓말을 하여 사람들을 선동하려 했던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몇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의로 남들을 속인 사람이라면 그는 위선자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가? 2. 예수님이 그렇게 파격적인 거짓말을 했다면 어떻게 강한 편견이 있는 당시 사람들 앞에서 유례없는 선행과 도덕적으로 이대하고 숭고한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었는가?

– 예수는 정신병자인가? – 오늘날 우리 교회 청년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나폴레옹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다면 그 청년은 분명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할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던 주장은 사실 이 청년이 나폴레옹이라고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파격적인 주장으로 유대인들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는 정신착란에 따르는 비정상적이고 불균형한 상태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을 여러 권위있는 정신과전문의들이 성경의 기록을 근거로 진단, 결론 내렸다. 예수님은 심오한 말을 했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상을 설파했으며, 가는 곳마다 수 많은 군중들이 따를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킨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정신병자였다는 생각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생각이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도 아니고 정신병자도 아니라면, 예수님이 했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이 정말로 성육신하여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도자들은 매우 진지하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땅에서의 여러분의 삶과 영생에 관하여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4장: 예수가 있다면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라? –

오늘날 인간의 지식에 있어서 과학이 가지는 권위는 거의 독보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라는 식의 말을 하며, 예수님의 신성이나 부활과 같은 문제들은 과학적이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는 수 많은 사실들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의 존재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신념들은 과학적으로 증명 불가능 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과학적인 증명은 어떤 사실에 의문을 가진 사람 앞에서 가설을 세우고 반복적인 실험을 통하여 같은 결과를 도출해내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이 사실인지 보여주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증명이란 어떤 현상의 측정과 실험 혹은 반복되는 관찰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나는 2013년 5월 3일 점심으로 삼겹살을 먹었다’라는 주장을 어떻게 반복적인 실험을 통하여 증명해 낼 수 있겠는가?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성격상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해 낼 수 없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날 고기집에서 계산한 영수증을 제시한다든지, cctv에 찍힌 고기를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증거로 제출한다든지, 아니면 고기를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목격자를 찾든지 해야하는 법적-역사적 증명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방법은 법정 재판에서 이루어지는 방법과 동일한 방법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로 이런 법적-역사적 증명의 범주에 속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것은 과거에 단 한번만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기에, 반복적인 실험과 관찰을 통하여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 5장: 신무신론의 도전 – 

2001년 9/11 에 있었던 뉴욕에 있는 WTC 비행기 테러 사건을 기점으로 소위 ‘신무신론자’로 불리우는 4명의 인물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 리처드 도킨스 (God Delusion의 저자)

2. 크리스토퍼 히친스 ( God is Not Great의 저자)

3. 샘 해리스 (Letter to a Christian Nation의 저자

4. 데이얼 데닛 (Breaking the Spell의 저자)

이들은 각각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오른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한 자신의 책들을 통해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탔고,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기도 했다. 저자들은 이런 신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니체, 프로이드, 마르크스, 러셀 등의 과거 무신론자들이 몇 세대 전에 했던 주장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신무신론자들만의 두드러지는 특징이 몇가지 있다고 말한다:

1. 신무신론주의는 진지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2. 과거의 무신론과 달리 신무신론자들에게는 종교적 믿음에 대한 관용이 없다. 그들은 종교는 악이라는 공식을 내세우며 모든 종교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신무신론자들은 특별히 기독교에 대해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붓는다.

또 신무신론자들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 중 하나는 종교는 맹신을 요구하며 오직 믿음에 기초한 반면에 무신론주의는 이성과 과학의 실증적 증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상당히 순진한 주장이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을 내세우며 초자연적인 존재가 불필요함을 주장하는 그들은 결정적인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 맹목적이고 물질적인 다윈의 진화 과정을 통해 발달해 왔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그것을 신뢰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무신론이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연한 과정의 산물인 인간의 두뇌가 우리로 하여금 그 세계를 이해하게 해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인 것이다. 결국 무신론자들은 이렇게 비합리적인 자신들의 세계관 속에서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경적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발전해 가는 이 세상의 과학적 지식에게 아무런 지지를 얻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신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현대과학은 오히려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가리키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생물학에서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는 생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불과 몇 나노미터 크기의 작은 세포 안에 백과사전보다 더 많은 방대한 정보가 저장되어져 있는데, 무신론자들은 이렇게 복잡하고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세포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대답을 내어놓지 못한다. 반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겐 섬세하게 디자인 된 생명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우주의 미세조정 (fine-tuning)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주에는 실제로 각각 완전하게 미세조정되어야하는 20여개의 보편 상수가 있는데 대부분은 경이로우리만큼 정교하게 조정되어져 있다. 20 여개의 이런 상수들이 각각 0.0000000000001% 만이라도 달랐더라면 생명은 고사하고 우주 전체가 붕괴되어버렸을 것이라는 사실은 모든 물리학자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과학적 사실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신론자들은 내어놓을 수 있는 만족한 말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이런 과학적 증거들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온 우주를 정교하게 설계하시고 지으신 하나님의 대한 믿음을 더 견고하게 다질 수 있게 된다.

– 6장: 성경의 권위는 충분하다 –

이 장에서는 중요한 주제인 성경의 권위 혹은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신적인 영감을 받아 기록된 무오한 기록일 뿐 아니라 개개인의 삶 전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책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라고 믿지만 대다수의 불신자들은 성경이 그저 전설이나 허무맹랑한 환타지 소설을 써놓은 책이라는 생각이 만연하다. 저자들은 많은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성경의 기록들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들인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 사본들은 얼마나 정확하게 전승되어 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본들이 존재하는지 등을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설명한다. 이 작업의 결론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현존하는 그 어떤 고문서들과 비교해봐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사본들은 압도적으로 많으며, 신뢰할만하고, 또 정확하게 전승되어 왔다는 것이다.

고대시대에 성경사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로 생긴 오류들을 가지고 트집잡는 바트 어만(Bart Ehrman)이나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도마, 유다, 빌립, 베드로, 마리아 복음서 등에 이미 정경으로 채택된지 오래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들과 동등한 혹은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예수 세미나 (Jesus Seminar) 등의 문제점 등을 저자는 조목조목 비판하며 현재 우리가 정경으로 가지고 있는 성경의 권위가 충분함을 역설한다.

– 7장: 제자들의 삶과 죽음이 말하는 예수 –

6장에서 고대에 쓰여진 성경이 오늘날까지 신뢰할 수 있을만한 방법으로 전승되어 왔는지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7장에서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그리고 성경속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증언들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그 증언들이 거짓인지 신뢰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증언인지를 확인 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제자들의 삶이 그들의 증언들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변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 중 거의 대부분은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예수를 메시아이자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했고, 그 강한 확신 때문에 잔인한 방법을 죽임을 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모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마태는 칼로 죽임을 당했으며, 도마는 창에 찔려 죽었고, 다대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모두 어떤 거짓말에 의해 속았거나 정신이 나갔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들이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거짓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자들이 속은 것이 아니라 정말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확인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 할수 있을까?  그 답은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여러가지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몇가지만 이야기하자면,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비겁하게 숨었으며,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도마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의 상처에 손을 직접 넣어보기전에는 믿을 수 없다라고 했던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했던 도마가 있는가 하면, 예수를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비겁하게 자신의 안위만을 꾀한 베드로도 예수부활을 목격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또한 예수의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는 평생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형제인 예수가 터무니없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러 다니면서 가족의 명예에 먹칠하고 있다며 수치스럽게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돌로 맞아 순교하기에 이른다.

하룻밤 사이에 회의적이고, 비겁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기 바빴던 제자들이 180도 급변하여 예수가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이 진리임을 굳게 믿고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전파했음을 생각했을 때 그들의 증언이 얼마나 신뢰할만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 8장: 메시아를 오해한 유대인과 제자들 – 

변증적 맥락에서 비교적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8장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메시아의 모습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실려있다. 제자들 뿐 아니라 1세기 유대인들이 이해한 메시아는 유대민족을 로마제국의 정치적 억압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 회복시킬 정치적 지도자를 이해했다.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를 그런 메시아로 이해했기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을 때에 그들은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그들은 예수가 단순한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다 줄 존재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영원한 죄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이 예수가 참된 메시아임을 죽기까지 확신에 찬 모습으로 증거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 부여를 하게 되었다.

– 9장: ‘정통 유대인 엘리트’가 만난 예수 –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의 회심과 삶은 예수의 메시아 됨과 또 부활 사건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준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가말리엘의 제자로써 그 시대 최고의 학문을 접하고 섭렵한 엘리트였으며, 로마 시민권을 소지한 특권 계층이였고, 철저한 유대식 교육을 통해 자기 입으로 자신을 율법의 ‘의로는 힘이 없는자’라고 지칭할만큼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예수를 만나 회심하기 전에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가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제일 먼저 앞장섰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 바울이 극적인 체험을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확신하게 되어 삶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된 이 사건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다른 증언들과 함께 예수에 관한 생생하고 일관성있으며 신뢰할만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 10장: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

7-9장에서 다룬 것 처럼, 제자들이 부활했다고 믿었던 예수가 애초에 죽은 것이 아니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혹은 예수가 죽은 것은 맞지만 시신은 도난 당했거나,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거나 숨겨졌고 제자들과 사람들은 일종의 환상에 빠져서 헛것을 보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망상에 빠진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10장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조명하여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한다. 예수 세미나와 같은 예수의 신성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주축으로 부활이라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하고 예수의 죽음과, 빈 무덤, 다시 나타나여 보진 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기 되었다. 저자들은 이 모든 가설들이 하나같이 대다수의 학자들이 사실(fact)로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명한다.

– 11장: 구약의 모든 예언을 이룬 예수 –

예수 이 땅에 오시기 수백, 수천년전부터 기록된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에 대한 수백 개의 예언들이 기록되어있다. 이 예언들은 태어날 장소와 시간이나 계보, 출생방식 같이 인간이 억지로 끼워맞출 수 없는 내용들도 허다하기에 예수가 성경이 가리키는 참된 메시아인지 확인 또는 검증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구약에서 언급된 모든 예언을 성취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예언 중 단 8개만이라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은 100,000,000,000,000,000 분의 1이며 이것은 우연의 이름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낮은 확률이다. 이것은 예수가 성취한 구약성경의 예언들은 우연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감으로써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 12장: 정녕 예수 말고 다른 길은 없는가 –

12장에서는 ‘왜 굳이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그것은 결국 죄와 구원, 공의로우시면서도 자비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사이에 나타는 딜레마로 귀결된다. 저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왜 그런 극단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선택하셔야 했는지를 설명한다.

– 13장: 예수가 나의 삶을 변화 시켰다 –

마지막장인 13장에서는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간증이 담겨 있다. 쾌락에 빠져있었고 교만하기 짝이 없었던 저자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일어나기 시작한 삶의 변화에 대한 그의 간증은 간략하게 씌여져 있지만 마음에 감동을 주고 복음의 능력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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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자도
저자: 존 스토트
평점: 4/5

들어가며

이 책의 저자인 존 스토트는 필자가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다. 그가 20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였던만큼 긴 소개가 굳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다. 필자는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존 스토트의 저서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균형잡힌 기독교>, <현대 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동성애 논쟁>, <성령 세례와 충만>,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기독교의 기본진리>, <설교자란 무엇인가>, <존 스토트의 복음전도> 등으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다. 단일 저자로써는 아마도 CS 루이스 다음으로 가장 열심히 탐독했던 저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2011년 7월 어느 날 그가 향년 90세로 별세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을 때 영적 멘토 한분을 잃은 것 같은 큰 상실감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이 글에서 소개할 <제자도>는 존 스토트가 별세하기 2년전 88세의 나이에 집필한 그의 마지막 책이다. 이미 4년쯤전 읽었던 책이지만 제자도에 대해 다시금 묵상해볼 기회가 생겨서 다시 펼치게 되었다.

제자도는 성경에서, 특히 신약 성경에서 드러나는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곧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뜻이기에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제자도는 성경의 핵심 진리의 연장선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져야 할 세계관과 이 땅에서의 사명, 삶의 자세, 태도, 책임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기에 더욱 그렇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자도의 본질을 8가지 나누어서 설명한다. 특별히 생애 마지막에 죽음을 앞두고 집필한 책인 만큼, ‘의존'(7장)과 ‘죽음'(8장)이라는 맥락에서 제자도를 설명하는 그의 통찰은 탁월했고 진솔했으며 필자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도 유익한 내용들이 많이 있었으나 의존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글만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의존

제자도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갖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설명은 필자가 충분히 묵상해보지 않았던 제자도의 한 측면이었던 것 같다. 그의 친구라는 존 와이어트의 표현처럼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의존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또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두려움과 조급함에서 좀처럼 자유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누구를 온전히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언약을 의심하고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은 아브람의 모습을 통해 폭로된 인간의 연약한 본성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것이고, 인생이란 그런 불확실성 속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지혜와 경륜 속에서 의도하신 선한 계획을 신뢰하고 의존하는 연습을 하는 것 아닐까.  그리스도 또한 다른 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다른 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하는 모습으로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위엄에는 흠집이 나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미성숙의 표지라는 그의 말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써, 또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써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죽음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몇 가지 측면이 있다.

1. 육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

모든 사람은 죽는다. 이 세상에 죽지 않은 사람은 없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직면해야 할 문제이며,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이다. 한 사람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곧 삶의 의미, 목적, 가치 등을 포괄하는 그 사람의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죽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다. 교수대 앞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라는 말을 남긴 본회퍼의 유명한 말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단순히 모든 것의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렇기에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박해를 받고 죽어나갔던 수많은 순교자들이 두려워하기는 커녕 영생을 누릴 기쁨과 감격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2. 죄에 대한 죽음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롬6:13)’라고 말한다. 여기서 ‘죽은 자’가 의미하는 바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의미이며 ‘다시 살아난 자’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에 죄에 대하여 죽지 않고서는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죽음과 구원을 연결지으면서도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명확하게 하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쉽다.

3. 자기부인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는 예수님의 말처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자아를 죽이는 자기부인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동반될 수 밖에 없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진정한 자기부인이 없다면 진정한 자기 발견,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제자도의 토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자기부인은 예수밖의 ‘나’의 상태가 ‘가망없음’임을 인정하고 철저히 낮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4. 선교

선교지에서는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난다. 또 선교의 현장에서는 고난과 박해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역설적이게도 그럴 때에 선교의 열매는 더 풍성하게 드러난다. 그렇기에 선교의 현장으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고난과 박해는 당연한 것이며, 담대함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축복이다. 그것은 죽음이 곧 열매를 맺는 길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짧은 시간안에 전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수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으로 감내한 고난과 박해 또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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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저자: 김성수
평점: 4/5

간략한 소개
이 책은 남가주 서머나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는 김성수 목사의 첫번째 강해집이다. 서울대 출신으로 80년대 대학생 시절 운동권에서 활동하다 구치소에도 수감된 적이 있고, 졸업후에는 정당에도 잠시 몸을 담았던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임을 미리 기억해 두면 처음엔 다소 과격하게 다가올 수 있는 그의 설교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저자는 “비 오던 날”이라는 자작곡으로 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 수많은 연예계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도미하여 신학 공부를 하는 중에 한동안 찬양 사역자로도 왕성히 활동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2004년 당시 LA의 한 대형교회 부목사로 섬기다가 나와 10명의 청년들과 교회를 개척하여 1년여간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만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 원고를 모아 편집한 것이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라는 책으로 출판이 되었다. 베스트셀러 반열에는 근접도 못할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끈 책은 아니지만, 일개 이민 개척교회 무명목사의 딱딱할 수 밖에 없는 기독교 교리 강해집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 책이 나름의 화제를 일으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가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는 남가주 서머나교회 웹사이트에 매주 올라오는 그의 설교가 매주 꾸준히 2~3만건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사실, 남서울교회와 삼일교회에의 담임목사자리가 공석이였을 때 청빙을 받았으나 거절한 적이 있는 점을 보아도 그는 실제 알려진 것보다 은근히 지명도 높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필자도 처음에 이 책을 반신반의 하면서 집어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기존의 여러 설교집, 교리집 등을 접해봤고 그들에게서 별다른 다른 점들이 없다고 느꼈었기 때문에 그저 또 지루하고 식상한 그런 교리 강단이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한편 한편의 저자의 설교에서 볼수 있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성경본문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정밀함을 통해서 신선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무엇이 다른가?
성경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이해, 풍부한 경험, 체험에 기반한 현 한국 기독교의 정확한 진단, 기복주의, 물질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 성공주의에 물든 현대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진심어린 충고, 직설적이고 공격적이면서도 완변한 완급조절을 보이는 전달력, 표현력, 추상적인 개념의 시각화, 확신에 찬 문체, 성경전체를 하나의 큰 틀에서 보고 하나의 대서사시로 묶어서 풀어내는 타고난 저자만의 능력 등은 장장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설교집을 읽는데에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독교의 본질이 왜곡되고 교회가 부패하여 그 중심에서 부터 흔들리고 있는 있유가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기 때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목사들에 의해 잘못 가르쳐지고 받아들여졌던 기독교의 진리들을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다시 바르게 제시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지가 올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동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 자신이 왕이 되고자 정신없이 달려가는 인간들에게 그들은 모두 가짜라고 선포해버린다. 그런 기독교는 없다라고 못 박아버린다. 오히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정반대의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흔히 기복주의, 물질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 성공주의 등에 물든 한국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저자의 설교를 들여다 보면 그가 맹목적으로 그런 비판을 쏟아내는 설교가가 아닌 것임을 바로 알게된다. 한국 기독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논리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성경을 그저 도덕, 윤리를 가르치는 책, 혹은 이 땅에서 성공, 부, 복 등을 이뤄내는 법칙이나 방법을 담고있는 책 정도로 밖에 보지 않는 목사들이 내어놓는 무수한 설교들을 가차없이 쓰레기 취급해버린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치고 있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그가 풀어내는 성경의 메세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성경 어느 구절을 가지고서라도 문맥적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하나님의 나라로  자연스럽게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는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의 한 부분만을 취해 억지스럽게 끼워맞추는 식의 어이없는 설교만 늘어놓는 목회자들을 분노하게 한다. 실제로 저자의 이런 강한 메세지에 대한 반감을 가진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저자의 설교 한편 한편이 나올 때마다  공공연히 그를 비판을 해왔으며, 저자가 섬기는 교회에까지 찾아와 직/간접적인 살해협박까지도 서슴치 않았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목회자들부터가 얼마나 그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다. 한편의 설교를 위해 십수권의 자기계발 서적을 끄적이는 그들에 반해 본문의 의미를 성경전체의 틀에서 해석하기 위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훑으며, 관련 신학서적과 설교, 신학 논문들까지도 참고하는 저자의 정밀성과 열정에서 나오는 설교의 깊이가 왜 다를 수 밖에 없으며 그들의  피상적이고 유치하며, 비성경적이기까지 한 설교를 자연스럽게 폭로하게되는지를 설명해주지 않나 생각된다.

특별히 눈 여겨 볼 주제들:
교회:
저자는 32장부터 44장까지 무려 200여 페이지를 할애하여 교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 만큼 저자는 교회의 본질과 의미, 그리고 역할의 중요성이 어떤 것이며, 그것들이 오늘날 어떻게 왜곡되고 변질되었는지, 이 시대의 교회가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 하나하나 짚어내어 조목조목 잘 설명하고 있다.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개념은 참으로 어려운 개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니 그냥 그런줄 알고 믿기만 하면된다라는 식의 무성의한 답변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일이 대부분이고 누구하나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목회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이것을 가지고 충분히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자신의 양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그 신비한 방식에 대해 물어왔을 때 만족스러운 답변을 해주고 싶어서 지혜를 구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십일조 해서 복 받으라는 식의 설교를 잘할까 하는 고민만 해서 그런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저자의 통찰이 담긴 설명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헌금:
헌금에 대한 설교를 이런 식으로 하는 설교자는 난생 처음 접해봤다.  “하나님의 주실 축복을 믿고 바라며 하는 헌금/십일조는 하나님이 10배, 100배로 갚아주신다” 혹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재앙이 온다/하나님이 다른방식으로 거두어가신다” 식의 맹목적인 물질의 헌신을 요구하는 설교에 익숙해진 한국교인들은 딜레마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금을 하자니 아깝고, 내지 않으려니 왠지 나쁜일 생길 것 같아서 찝찝하고. 아마 헌금보다 한국 교회의 기복주의를 더 잘 대표하는 예는 없는 듯하다. 헌금은 내가 드린 물질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확신이 없으면 할 필요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또 한국 교회(특히 대형교회)에는 사람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바쳐진 헌금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으니 최대한 많은 헌금을 걷어들이고 말겠다는 정신도 많이 퍼져있다. 성공주의를 조장하는 설교로 정평이 난 한때 청년만 2만명이 넘게 모였다는 삼일교회 전병욱이 목사가 2010년 LA에서 있었던 어느 집회에서 설교 중에서 이런 말을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이 하는 것을 직접 듣고 까무러칠 뻔한 적이 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배우자를 찾아 결혼하는 일이 많은데, 자매들이 배우자를 찾을 때 믿음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둘 다 중요하게 본다. 우리교회는 교인들이 내는 십일조 내역(액수와 낸 날짜)을 공개하기 때문에 형제들이 눈물을 머금고 10의 3조 또는 10의 4조를 하기도 한다. “

목사가 설교 중에 한말이 맞을까 싶을정도로 어이없는 이 발언에 대한 씁쓸함을 강하게 나타내며 집회가 열렸던 교회의 청년부 목사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그가 내놓은 대답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어차피 인간은 100%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께 물질을 바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약간의 강제적인 분위기를 통해서라도 헌금하여 그로 인해 돌아오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이런 분위기에 정면으로 반하는 메세지를 전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로 드릴 수 있는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제발 헌금 하지말라는 것이다. 헌금 때문에 고민하고 시험드는 분들을 위해 추천한다.

성령:
저자는 성령을 설명하기 위해서 3장을 할애한다. 기적, 치유, 방언, 은사 등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성령이 올바로 설명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과연 누구인지,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성령충만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성령훼방이란 과연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인지 등의 이론적이고도 실질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 도출해낸다.

아쉬운 점
이 책은 조직신학 서적도 아니고 당연히 모든 주제를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구원에 대한 설교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구원만큼 중요한 교리도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원만큼 왜곡되고 논란이 많은 교리도 드물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이신칭의와 같은 개념의 정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흔히 많이 강조되는 성화와 같은 개념에 대한 그의 견해와 설명이 없었다. 오타도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출판사의 작업이 허술하다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차례 
1장: 인간과 죄(I)
2장: 인간과 죄(II)
3장: 신령과 진리의 예배
4장: 세례
5장: 성경
6장: 헌금
7장: 안식일과 주일
8장: 삼위일체
9장: 성령(I)
10장: 성령(II) 성령세례
11장: 성령(III) 성령충만
12장: 성령(IV) 성령훼방
13장: 기적
14장: 신비주의와 기복주의
15장: 구약과 신약
16장: 은혜
17장: 믿음
18장: 캘빈주의와 오대 강령으로 본 하나님의 사랑
19장: 성찬이란 무엇인가?
20장: 외식이란 무엇인가?
21장: 기도
22장: 주기도문(I)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23장: 주기도문(II)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4장: 주기도문(III)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5장: 주기도문(IV)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26장: 주기도문(V)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27장: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
28장: 그리스도인의 고난(I) 고통 없는 지옥
29장: 그리스도인의 고난(II) 피할길은 있는가?
30장: 그리스도인의 고난(III) 상처와 가계에 흐르는 저주?
31장: 죽음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삶
32장: 교회(I) 교회란 무엇인가?
33장: 교회(II) 교회와 치리
34장: 교회(III)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35장: 교회(IV) 교회의 본무 (1) 교회, 거룩을 향하여 가는 자들
36장: 교회(V) 교회의 본무 (2) 교회,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들
37장: 교회(VI) 교회의 본무 (3)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사람들
38장: 교회(VII) 교회와 목사
39장: 교회(VIII) 교회, 오직 예수로만 위로 삼는 자들
40장: 교회(IX) 교회와 복음
41장: 교회(X) 사랑의 공동체
42장: 교회(XI) 온전함을 향하여 온전케 되어지는 교회
43장: 교회(XII) 교회와 직분
44장: 교회(XIII) 교회!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무질서한 은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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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무질서한 은사주의 (Charismatic Chaos) 
저자: 존 맥아더 (John MacArthur)
평점: 3.5/5

간략한 소개
오늘날 출판되고 있는 기독교 서적을 살펴보면 은사, 방언, 신유, 성령체험, 혹은 천국/지옥여행과 같은 매우 주관적인 체험을 다룬 간증집들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얼마나 초자연적인 기적에 관심을 가지고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기적, 신유, 방언, 은사와 같은 것들이 오늘날 기독교를 움직이고 유지시키는 없어서는 안될 그런 것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제부터 기독교가 이렇게 값싼 것으로 전락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개신교 세력의 50% 가 오순절 계열일 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도 장로교 침례교 등 교단에 상관없이 이런 은사주의적인 요소가 교회 안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고, 한국 특유의 기복주의와 접목되어 이상한 형태로 변질되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이 문제는 분명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만약 초자연적인 은사를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그리스도인이기에 신앙 공동체 안에서 영적 소외감을 느끼고 있고, 믿음이 부족하여 그런 은사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40년간의 꾸준한 강해설교를 통해 현존하는 목회자 중 가장 탁월한 강해 설교자로 정평이 나있는 저자조차도 자신이 그런 초자연적인 은사를“못 가진 자” 임을 밝혔으며, 이같은 고민을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 책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저자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동시에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과격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특별히 간결하지만 강한 확신이 담긴 문체와 타협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문체 덕분에 훨씬 더 강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읽어도 과격한 부분이 많은데 초판이 발행된 1978년에는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가히 상상하기 힘들정도이다. 실제로 이 책은 저자를 존경해오던 오순절 계통의 많은 동역자들이 그로부터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된 책이기도 하다. 저자도 은사주의적인 교리나 관행을 비판하는 작업이 본질적으로 분열을 조장하거나 적대적인 행위로 간주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도 바울과 요한이 종종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전파되는 모든 가르침을 꼼꼼히 살펴보고 거짓된 가르침과 비성격적인 행동을 폭로하고 비판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그의 일관된 신념을 이 책에서 다시 한번 나타냈다. 그의 주장은 다소 파격적이고, 그의 표현은 과격할 수 있으나 필자는 오히려 논란이 될 만한 진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하라는 에베소서4:15의 말씀을 신실하게 실천하려 한 그의 노력이 책 전체에 녹아있음을 발견했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은사주의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분열적이라거나 귀에 거슬린다거나 사랑이 없다는 명분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식의 피상적인 화평과 연합을 추구하는 일은 비성경적인 교리에 대한 문제를 덮어두고 미루는 것 밖에 되지 않으며, 결국엔 혼란과 동요를 팔연적으로 가져온다는 사실을 용기있게 역설했다. 아무도 감히 나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속에서 논란이 될 만한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일을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한 확신으로 비판을 하는 저자의 카리스마가 단연 돋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는 1950년대 초 많은 교회가 연합을 위해 교리를 벗어 던지려고했던 복음주의 연합 운동의 여파 속에서 홀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며 일시적인 분열을 감수하더라도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힘쓴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인물들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평하고 싶다. 은사주의에 관한 그의 전반적인 주장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많은 예들은 다소 극단적인 예들이 많이 있으며, 간간히 무리한 논리적 비약도 눈에 띄기에 비판적 읽기가 필수적이다.

차례
1. 경험은 진리의 타당한 기준인가?
그 모든 것은 성령 세례와 더불어 시작된다
┃최고의 여행
┃기독교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 접근 방식
┃베드로는 은사주의자였는가?
┃바울은 체험에 의존했는가?
┃열심이지만 우둔한
┃체험적인 신학의 기원
┃성경을 지키기 위한 싸움

2.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하시는가?
영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감에 대한 현대의 견해
┃발전적 계시?
┃정경은 완성되었다
┃정경이 선택되고 완성된 과정

3. 예언자인가, 광신자인가, 이단인가?
캔자스시티의 예언자들
┃몬타누스주의
┃로마 가톨릭
┃신정통주의
┃신흥 종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성경보다 특별한 것’으로

4.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피해야 할 세 가지 오류
┃건전한 성경 해석을 위한 다섯 가지 원리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은사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잘못 해석하는 네 성경 본문
┃똑바로 자르기

5.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시는가?
기적이란 무엇인가?
┃현대의 기적이란 대체 무엇인가?
┃‘기적의 시대’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언제, 왜 기적을 사용하셨는가?
┃오늘날에도 기적이 필요한가?

6. ‘제3의 물결’의 배경과 진로
표적과 기사?
┃능력 전도?
┃성경 지향?
┃복음주의적 유산?

7. 성령의 은사는 어떻게 역사하는가?
성령의 은사와 인간의 마음
┃영적인 은사인가, 영적인 재난인가?
┃고린도 교회의 은사
┃고린도의 이방 종교
┃신비 종교의 영향
┃초대 고린도 교회를 찾아가 보자
┃거짓 은사에 미혹된 고린도 교회
┃귀중한 것만이 위조의 대상이 된다

8. 초대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은사주의의 차후 세례 교리
┃사도행전 2장 자세히 보기
┃사도행전 8장 자세히 보기
┃사도행전 10장 자세히 보기
┃사도행전 19장 자세히 보기
┃능력을 구해야 하는가, 발휘해야 하는가?
┃성령 세례는 사실인가, 느낌인가?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는 무엇인가?

9. 신유 은사는 지금도 존재하는가?
무엇이 성경적인 기적의 은사였는가?
┃신유 은사 자세히 들여다보기
┃그 모든 증거는 대체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떻게 고치셨는가?
┃사도들은 어떻게 병을 고쳤는가?
┃은사주의의 신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왜 병에 걸리는가?
┃그리스도인들도 병원에 가야 하는가?

10.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
┃방언은 하늘의 언어인가?
┃가짜 방언
┃고린도 교회의 방언 남용
┃방언도 그치고
┃마지막 성령 세례?
┃방언은 왜 그토록 인기가 있는가?

11.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
성령에 취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참된 영성의 특징
┃은사는 영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바울 대 거짓 사도들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충만함”의 정확한 의미
┃성령 충만 받는 법
┃성령 충만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 충만의 한 본보기인 베드로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한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2. 하나님은 건강과 부요를 약속하시는가?
거짓 종교와 참 종교
┃잘못된 하나님
┃잘못된 예수님
┃잘못된 믿음
┃그리스도인의 상식(Christian Sense)인가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인가?

맺음말: 은사주의 운동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오류에 맞서라
마지막 말

예수는 교회를 낳고, 교회는 예수를 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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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는 교회를 낳고, 교회는 예수를 낳고
저자: 김성수
평점: 4.5/5

사도신경 속에 기록된 신앙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중요한지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이것을 마치 모든 예배의 형식적인 하나의 절차로만 생각하고 무슨 주술 외우듯이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 담긴 깊은 의미를 곱씹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축약해놓은 사도신경에 대해 설교를 한다고 하면 따분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줄줄 외워서 다 아는 사도신경 같은 것은 식상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내 삶에 바로바로 “적용”되는 훨씬 더 “실천적”이고 “실용적”이며, 감동과 흥미가 가득하고, 결연한 결심과 함께 의지의 불을 붙이게 하는 그런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이며, 현실적인 메세지, 우리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동성애자들과 같은 사탄의 세력에 맞서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자는 메세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실력을 키워 성공하고 잘 되어서 높은 고지를 점령하여 이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자는 고지론을 신봉하는 메세지만을 들어왔다면 이 책을 일독할 것을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정밀성있고 완성도 높은 개혁주의적 설교를 하는 김성수 목사님은 사도신경 강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통찰력과 분석, 그리고 은혜의 체험으로 비롯되는 깊은 복음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준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성도로써 내가 믿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내 신앙을 불신자와 나누고 싶다면, 또 그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에 푹 빠져 감격하고 싶다면 사도신경을 공부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배우는 것 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차례

1.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2.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경륜
3.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1 : 예수
4.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2 : 죽임 당한 그리스도
5.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3 : 우리 주
6.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4 : 외아들
7.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8.본디오 빌라도엑게 고난을 받으사
9.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1
10.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2
11.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3
12.장사한 지 사흘 만에
13.음부에 내려가사
14.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15.하늘에 오르사 : 승천
16.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17.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18.성령을 믿사오며
19.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20.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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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 (Truth and Authority in Modernity)
저자: 레슬리 뉴비긴 (Lesslie Newbigin)
평점: 4.5/5

간략한 소개
오랜만에 상큼한 책을 만났다. 인도 선교사이자 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레슬리 뉴비긴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번역본이 100쪽 남짓하는 짧은 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 충실히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조차도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오늘날 성경적 권위에 대한 통해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에 대한 참신한 고찰을 통해 명쾌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그의 탄탄하면서도 번뜩이는 논리가 돋보이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그가 진리와 권위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라는 것이 아님을 설파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 엿보인다. 알짜배기 지식들이 많은 것 같아서, 서평을 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핵심적인 내용을 최대한 많이 요약하여 정리해볼까 한다.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라는 책의 제목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 시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나 생각해본다.

권위있는 지식에 대한 근대적 견해
저자는 ‘근대성’을 계시와 전통을 권위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유럽 지성 세계를 지배하게 된 사고방식으로 정의한다. 권위있는 지식은 사실의 관찰과 그에 대한 엄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한 검증을 거친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계시에 대한 믿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근대적 견해는 하나님에 계시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기독교 전통을 통째로 전복시키려 든다. 믿음을 “지식에는 못 미치지만 우리 자신의 정신을 설득하는 것” 이라고 정의내린 존 로크(John Locke)는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중세 스콜라철학자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무스(Anselmus)나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e)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믿음을 지식에 이르는 길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대안으로 취급하게 된 근대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식의 권위에 대한 근대적 인식의 역사적 출발점을 추적하다.
지식의 권위에 대한 이러한 인식변화를 추적하기위해 저자는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스콜라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별히 아퀴나스가 기독교의 전통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새로이 정립하는 일에 있어서 이성의 작용만으로 알 수 있는 것들과 계시와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을 서로 구별한 것을 지적해낸다. “근대 무신론의 기원”이라고 보여지는 이러한 아퀴나스의 독특한 업적은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가 이루어낸 충격적인 우주론이 가져온 혼란스럽고 회의적인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하나님과 영혼이 존재한다고 어떻게 확실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란 명제 위해 근대 이성주의 철학의 정초를 닦은 데카르트가 등장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하나님과 영혼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논증을 개발하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룬 그의 업적이 도리어 교회의 전통을 공격하게 되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안셀무스와 어거스틴이 참된 지식에 이르는 길은 믿음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데카르트는 의심이야 말로 참된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기존의 사상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데카르트의 사상의 영향이 남아있음은 ‘정직한 의심’ 혹은 ‘맹목적 믿음’ 이라는 일상의 표현만 봐도 자명해보인다. 데카르트는 끊임없는 의심을 통하여 의심할 수 없는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위에 수학적 명료함과 확실성을 지닌 논증을 세워 참된 지식을 찾고자 했는데, 합리적인 의심이라면 참이라고 믿는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데카르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자기파괴적일 수 밖에 없었고, 궁극적으로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명백한 확실성을 가진 것을 찾는데 실패하고 니체가 예견했던대로 허무주의로 이어졌던 것이다. 흔히 과학적 지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다’라는 말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어느정도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지식은 일련의 합리적인 믿음을 토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일단 의문부터 품고 시작하는 지식에 대한 데카르트의 접근 방식은 결국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의 피조물 중 하나가 그의 존재를 증명할 수조차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고 시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의심없이 아는 것은 가능하지만, 믿음 없이 알 수 있는 길은 없다”라는 말이 품은 깊은 진리가 한층 빛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모든 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지닌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혼돈으로 끝날 수박에 없다는 진리를 잘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뉴비긴은 성경의 이 진술안에 담긴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 한 문장으로 근대성의 중심 논제를 완전히 전복시킬수도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이 구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오늘날에는 합리적 사고가 우리에게 종교적 신념에 대해 중립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종류의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고, 그래서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및 구속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든든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저자는 단호하게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인간의 모든 체계적 사상은 궁극적이고 기본적인 것에 대한 모종의 믿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에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믿음의 문제이자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지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합리적인 사고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미지의 영역으로의 비합리적인 도약이 아니라 그것은 ‘나를 따르라’는 인격적 초대에 대한 책임있는 수용에 관한 것일뿐 합리접인 계산에 의한 행위도,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라는 그의 명쾌한 설명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지는 권위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끊임없는 의심을 통하여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찾아 지식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데카르트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버렸음을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해 뉴비긴은 만약 당신이 데카르트의 탐구심과 동일한 자세로 권위있는 지식을 찾기 원한다면, 성경은 실망만 안겨줄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데카르트가 추구했던 그런 확실성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한 백성을 인도하여 그들에게 창조의 목적에 대한 참 지식을 주려고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씨름하는 모습을 담은 책으로써 받아들인다면, 인간이 합리적으로 하나님을 논증해내려는 사고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신 속에 숨겨진 온 우주와 인류를 향한 목적이 결국에는 성취될 것임을 신뢰하며 성경에 권위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곧 개개인이 성경을 권위있는 지식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도 안셀무스와 어거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우선 믿음이 선행되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의 문제’이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문제’가 아니기에, 복음을 “영원하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내세운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그의 날카로운 지적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든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의 말씀이 “영원하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인함이지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동원하여 성경은 데카르트가 의미했던 그런 객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확실”을 지닌 것으로 결론내고 믿게 되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절대로 이 믿음은 생기지 않는다.

뉴비긴의 주장의 변증학적 의의
자연신학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필자가 관심이 많은 변증학의 방향/방법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언급을 했다. 자연신학 자체는 문제점이 많다고 보지만, 자연신학이 탐구하는 영역을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로 부터 시작하여 거기에 담긴 철학적 함의를 탐구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그런 작업을 통하여 세상의 거짓된 사상들과 신념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비성경적인 가정들을 폭로해내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및 계시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증언을 의심하도록 만들었던 실재들을 오히려 더 잘 이해하도록 어떻게 길을 열어놓았는지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필자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기독교 변증의 여러 방법론 중에서 뉴비긴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자 코넬리우스 반틸 (Cornelius Van Til)로 대표되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적인 변증, 즉 절대적인 권위로 말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을 처음부터 전제로 삼는 접근을 가장 지지하는 입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방법론은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하고, 기독교의 정당성과 탁월함을 변증하는 일에 있어서 성경 말씀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없다는 성경 자체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면에서 그의 신학도 정통 개혁주의 노선에 있는 많은 신학자들과 어느정도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반틸 또한 뉴비긴처럼 그의 저서, ‘Christian Theory of Knowledge’ 와 ‘The Reformed Pastor and Modern Thought’ 에서 밝혔듯이 자연신학을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했다는 부분에서도 이 두 신학자들의 기본적인 신학적 토대가 정통 칼빈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지배적인 오늘날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뉴비긴은 우선 ‘객관적 진리’의 개념을 버려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교회의 삶과 예배를 통해 공동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몸소 살아냄으로써 보여주어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예수님의 초청을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끝이라는 말이다. 필자는 뉴비긴이 복음전도/변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너무 소극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고, 그의 주장에 공감할 수 없지만 여하튼 그의 글의 전개를 살펴보았을 때 어느정도 일관성있는 결론인 듯하다.

차례
1. 하나님의 권위
– 현대는 권위를 의심한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동
– 외적 권위와 내적권위
– 오직 은혜로
– 오직 믿음으로

2. 하나님 권위의 매개체
– 성경
– 전통
– 이성
– 경험

3. 현대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증언하다

오리진 (Ori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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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리진
저자: 데보라 하스마, 로렌 하스마
평점: 3.5/5
 

들어가면서
수 년간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기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책들을 끄적이면서 제가 가장 아쉬웠던 점은 인류의 기원, 생명의 기원 그리고 우주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의 다양한 관점들을 비교, 대조하면서 충분히 다룬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게놈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Francis Collins와 같이 다른 여러 관점들의 약점들을 조목 조목 집어가며 비판하하고 자신이 왜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한 사람도 있었고, 몇년전 UC Irvine에 있는 저명한 생물학자 Francisco Ayala와 Talbot 신학교의 William Lane Craig 교수의 공개토론의 포맷으로 살짝 지적설계론과 유신진화론자가의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최신 창조/진화 논쟁의 가장 주요한 주제들은 무엇이며, 매일 축척되어져가는 방대한 과학지식들을 가지고 이 논쟁의 최전선에서 학자들의 대화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또 이 논쟁에서 과학적, 철학적, 신학적 요소들은 무엇인지 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젊은 지구론과 유신진화론 대화가 가능한가?
또한 젊은지구론 진영에서는 진화론을 비롯하여 빅뱅, 탄소 연대측정법 등 주류 현대과학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비판하며 부정하지만 주류과학계에서는 이들의 비판이 (어떤 이유에서든)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진화론, 빅뱅이론 등에 결함이 있는 부분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필자도 생각하지만 현존하는 자연주의적 설명(naturalistic explanation) 중에서는 이들을 대체 할만한 마땅한 다른 이론이 아직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독교 진영에서 주류 현대과학을 싸그리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서며 기독교는 비과학적인 종교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과연 전략적으로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던 생각이 난다.

“진화론과 빅뱅이론, 탄소 연대측정방법에 그토록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과학계는 저런 이론들에 대한 비판을 무시하는가?” 라고  젊은지구론자에게 물으면 “천동설이라는 패러다임에 빠져서 지동설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오늘날 비슷하게 주류 과학계가 진화론과 빅뱅이라는 패러다임에 갇혀서 다른 대체이론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자에게 “왜 압도적인 과학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젊은 지구론자들은 주류 현대과학을 부정하는가?” 라고 물으면 또 동일한 천동설/지동설 논쟁의 예를 들면서 “과거에는 교회가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성경의 일부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성경이 천동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여 지동설을 이단으로 정죄했기 때문에 지동설을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 처럼 오늘날도 진화론, 빅뱅이론과 같은 과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함에 따라 아직까지도 젊은지구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대답을 한다.

하지만 창조-진화 논쟁, 우주의 기원에 관한 논쟁, 그리고 무신-유신 논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다수의 기독교 학자들은 주류 현대과학을 대부분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것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무너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성경을 뒷받침해주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며 이 논쟁들은 종교 vs 과학의 전쟁이 아님을 설명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Francis Collins 같은 세계적인 유전학자가 한 예이며, 또한 Alvin Plantinga와 같은 거물급 기독교 철학자는 진화론이라는 과학이론 자체를 가지고 자연주의를 무너뜨리는 Evolutionary Argument Against Naturalism (EAAN)이라는 논증을 발전시키는 작업에 성공을 거두었다. William Lane Craig를 통해 다시 주목받게 된 Kalam cosmological argument도 빅뱅이론을 전제 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이며, 이 논증을 위해서 그는 왜 과거 어느 한 시점에 빅뱅이라는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지를 철학적 사유와 수많은 과학적 증거들을 통해서 설명해냈다. 그 외에 영국의 성공회 사제이자 이론물리학자인 John Polkinghorne을 비롯하여 분자생물학자이자 신학자인 Alister McGrath, Oxford 대학의 수학자 John Lennox 등의 다수의 복음주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진화론과 빅뱅이론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과학의 성과들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과학과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지구론의 관점에서 모든 과학적 데이터를 설명할 수 있는 대안적인 과학 모델을 세우기 위해 정직과 과학적 성실성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는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도 많이 있다. 이 글에는 그들에 대한 필자의 비판적인 생각이 들어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필자는 그들의 깊은 신앙위에 있는 그들의 소명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지지를 보내고 싶다. 또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독교에, 또한 과학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 책이 기존의 책들과 다른점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을 저술한 데보라 하스마, 로렌 하스마 부부가 일반 대중들을 위한 의미있는 작업을 했다고 말하고 싶다. 가히 80~90% 이상의 대다수 한국 교회들이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창조기사의 문자적인 해석과 만년 이하의 젊은 지구 창조론을 지지하고 있고, 진화론과 빅뱅이론은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기독교의 진리를 무너뜨릴 사탄의 속임수 정도로 간주해 버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소개한다는 일이 상당히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필자는 유신진화론이 아닌 지적설계론을 지지하는 입장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1년에 출간된 The Genesis Flood 라는 John Whitcomb와 Henry Morris의 책으로 시작된 젊은 지구론운동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다소 경직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의 복음주의 기독교안에서도 좀 더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물론 젊은지구론 진영에서는 “타협”이론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뉘양스를 띄는 용어를 선택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고 좀 더 열린 자세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소개를 해보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가지고 씨름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충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연구될 수 있는 자연에 남겨져있는 증거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과 그의 피조세계가 성경과 조화를 잘 이룰 수 있는 더 충실한 성경해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건전한 창조신학을 정립을 위한 노력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유신진화론적인 입장을 고수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고 다른 입장들을 비판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 그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과 과학의 관점에서 여러가지 입장들을 심도 있게 살펴보게 하고 스스로 더 깊이 연구해볼 수 있는 단계까지 그들을 인도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그들은 또한 기독교 안에서의 다양한 관점들의 차이점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점들, 동의하는 부분들도 상당히 큰 강조점을 두고 책을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더 존중해주고 서로의 의견에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울여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우주 만물의 창조를 연구하며 배운 것들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타당한지 아니면 성경을 연구하며 배운 것들이 우주 만물 창조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타당한지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젊은 지구론자들은 대체적으로 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 듯 해보이지만 저자들은 과학을 신학 위에 혹은 신학을 과학 위에 올려놓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두 두가지 영역을 모두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함을 강조한다. 성령님의 조명하에 과학과 신학의 새로운 이해와 지혜를 깨닫는 일이 가능하기에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자연 세계의 지식을 가르치시고자 한다면, 겸손히 들어야 할 것이고, 또한 과학으로 인해 성경의 특정 부분을 무시하거나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모순되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지만, 특정 구절이 여러 의미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은 과학을 통해서 그 구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과학적 진술과 세계관적 진술의 분리
오늘날 젊은 지구론진영은 진화론과 같은 특정 과학이론의 기원에 대해 과학자들이 무신론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며 비판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Answers in Genesis 와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로 대표되는 미국의 젊은지구론 운동과 한국창조과학회에서 동일하게 보이는 경향인 듯하다. 과학자들이 naturalistic explanation만을 찾는다는 점에서, 또 절반 이상이 무신론자 혹은 회의론자들이라는 점에서 아주 틀린말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양심있는 과학자들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도 많이 있고 또 과학계 자체가 지속적으로 기존의 이론에 대한 오류를 찾아서 고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젊은지구론자들이 이런식으로 주류과학계에 몸 담고 전문적으로 연구에 임하는 과학자들을 싸잡아서 무신론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젊은지구론자들도 그들로부터 종교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 전체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며, 구체적인 과학적 결과를 면밀히 살펴보지 않고 과학을 거부해 버리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자연 속에 두신 계시의 증거를 너무 쉽게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기원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과학 자체라기 보다 유신론이라는 세계관을 비방하기 위해 과학을 남용하는 scientism 혹은 과학적 무신론주의임을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Richard Dawkins를 비롯하여 Daniel Dennet, Sam Harris 와 같은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신무신론자(new atheists)들도 무신론을 진화론과 같은 과학으로 포장하여 대중에게 던지는 것이고 Alvin Plantinga와 같은 학자들이 이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왜 그들의 무신론적인 세계관과 진화론이 양립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예를들어 진화론과 관련해서 젊은 지구 창조론자, 점진적 창조론자, 유신진화론자들의 입장이 차이가 있긴하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진화주의이다. 진화주의의 주장을 단순화시켜서 보면 다음과 같다:

전제 1: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모든 동식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기독교는 거짓이다.
전제 2: 과학에 따르면 진화론은 사실이다.
결론: 기독교는 거짓이다.

이에 대해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과 점진적 창조론자들은 전제 2를 부정함으로써 진화주의에 맞서는 것이고, 유신진화론자들은 전제 1을 공격함으로써 진화주의에 맞서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그리스도인들이 과학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진술에 섞여서 던져지는 이런 세계관적 주장을 분리시켜서 과학적 진술과 세계관적 진술을 구분하고 따로 평가하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더 나은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적설계론의 역할
UC Berkeley의 법학과 교수 Philip Johnson으로 대변되는 지적설계운동은 Seattle에 위치한 Discovery Institute를 중심으로 Michael Behe, Stephen Meyer, 그리고 지적설계 이론의 theorist라고 할 수 있는 William Dembski와 같은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현대 기원에 관한 논쟁을 상당히 흥미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지적설계 이론은 자연에 존재하는 설계에 대한 증거들을 거론하며 이 증거들을 설명하기에 진화론이 불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동기로 지적설계이론에 뛰어들었지만 과학으로 인정받기 위해 최대한 종교적인 성향을 띄는 주장은 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지적 설계이론이 비자연적인 설명을 하고 있기에 과학적이지 않다, 유사과학 (pseudo-science)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 지적설계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이 과학을 너무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결론이 자연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 자연세계에서 나타나는 증거가 나타내고 있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라고 주장한다. 지적설계론자들의 주장은 결국 과학이라는 학문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지만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철학자들도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비과학인지를 아직도 정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한채 계속 이것은 과학적이고 저것은 과학적이지 않다라는 의미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지적설계론이 그들이 말하는 “과학”만이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순진무구한 생각에 빠진 수많은 자연주의자들에게 과학이 어떤 것이 되어야하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과학이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지만 과학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이였다고 생각된다.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 일급 기독교 철학자, 과학자, 신학자들도 엄밀히 말하면 지적설계이론과 유신진화론의 경계에 머무르며 자신들의 논증을 발전시키는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진화론이라는 전반적인 틀은 받아들이되, 세부사항에 있어서 진화론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과 진화주의에 사로잡혀서 큰 논리의 비약을 이루게 한 많은 무신론자들의 논증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지적설계론적인 요소들을 적당히 포함시키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만큼 지적설계론이 자연주의와 과학적 무신론을 비롯한 여러 무신론적인 세계관을 배격하는데에 있어서 큰 무기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가면서
이 책은 과학을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학생들 뿐만 아니라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평신도들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쉽게 쓰였다.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이 기원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너무 성급하게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이 논쟁의 쟁점은 무엇인지, 학자들간의 대화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좀 더 잘 이해한 후에 자신의 입장을 결정할 수 있도록 장려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램을 해본다. 그 결정이 젊은 지구론이든, 점진적 창조론이든, 유신진화론이든, 다른 어떤 이론이든 간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 분의 영광이 가장 잘 들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믿음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기에, 의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중해줄 수 있고 또 겸손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차례:
1.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세계
2. 세계관과 과학
3. 과학: 하나님의 세계를 연구하는 과정
4.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가?
5. 창세기: 일치론적 해석
6. 창세기: 비일치론적 해석
7. 아주 오래되고 역동적인 우주
8. 진화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들
9. 동식물 진화의 증거
10. 지적설계
11. 인간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신학적 쟁점들
12. 아담과 하와
13. 남아있는 질문들
14. 경이와 예배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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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톰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What St. Paul Really Said?)
저자: 톰 라이트
평점: 4/5

간략한 소개
이 책의 저자인 톰 라이트는 아마도 복음주의 자유주의를 통틀어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신학자일 것이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그의 방대한 저술도 그렇지만 그는 최고 수준의 학문적 저술과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는 대중적 저술을 동시에 해내고있는 몇 안되는 신학자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그와 쌍두마차를 이룰만한 학자는 없어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학계에서 그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이다. 특히 그의 영향력은 6권으로 계획하고 있고 4권까지 이미 출판된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Christian Origin and the Question of God)> 시리즈를 통해서 더욱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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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는 성경의 권위를 철저히 인정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자로 분류하는 것이 마땅하고, 실제로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 연구와 같은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어 복음주의 기독교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내놓고 있는 많은 저작들, 특히 바울신학 (Pauline Theology) 쪽으로 오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가 내놓는 이론과 주장들이 전통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많으며, 더 나아가서는 마틴 루터나 존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잘못된 성경이해에 기초하여 개혁교회를 출범시켰다고까지 주장하는 대담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존 파이퍼 목사가 톰 라이트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책을 쓰면서 톰 라이트도 그에 대한 답변으로 책을 내면서 맞대응하는 일도 있었고, 한국에서는 현재 톰라이트가 재직하고 있는 University of St. Andrews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승구 교수를 주축으로 그의 신학에 대한 몇몇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방대한 성경적, 학문적 지식 바탕위에 쌓아올린 톰 라이트의 사상을 제대로 비평할 수 있는 실력이 되는 학자는 없어보이고, 지금까지 나온 목소리들은 비평보다는 불평에 더 가깝지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복음과 칭의
이 책은 논란이 되고있는 그의 바울신학을 대중에게 소개한 책이다. 바울에 관한 6~7가지 질문에 대하여 300여페이지에 걸쳐 현란한 글솜씨로 풀어 설명을 해놓았지만 역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울이 ‘복음’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라는 질문과 바울이 ‘칭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나?라는 질문일 것이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복음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1세기 유대교의 배경 속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있는 것처럼 복음이란 개인적이고 비역사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메세지가 아니라, 오히려 메시아의 구원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고 예수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계의 왕이라는 선포였다고 말한다. 복음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 이루어진 예수라는 왕에 대한 선포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칭의에 관해서도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의 시선으로 바울을 연구한다. 이 책에서 톰 라이트가 칭의에 관하여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는 전통적으로 이해됬던 것과는 달리 구원론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론의 문제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대답을 도출하게 해준 개념이 바로 칭의라는 개념이였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바울이 칭의를 그런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바울이 의도한 칭의란 구원을 얻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누가 이미 구원을 받은자인가 혹은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라는 질문에 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의(righteousness)라는 단어를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어찌됬든 그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이고 500년동안 이어져왔던 성경의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인 레벨에서부터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음을 암시한다. 최근 그의 바울신학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기원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 시리즈 4권이 출간되었다. 30여년 이상의 긴 시간동안 그가 고민하고 집요하게 연구해온 방대한 결과물들을 1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에 담아냈다. 바울신학계는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하여 앞으로 더 많은 뜨거운 논쟁이 일어날 것이고 복음주의 기독교진영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울 것이다. 건설적인 좋은 대화들을 통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신학적 진보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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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
저자: 이지성
평점: 2/5

간략한 서평
‘꿈꾸는 다락방’,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리딩으로 리드하라’,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등으로 베스트셀러작가의 명성을 얻게 된 이지성씨가 용기있는 시도를 했다. 모태신앙으로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치열하게 했던 교회와 목사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한 그의 책이 나온 것이다.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 라는 제목부터가 다소 도발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세상에서 목사가 제일 싫었다고 고백하는 그의 모습에서 날이 갈수록 실망감만 안겨주는 한국교회와 목사들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는 필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내심 반가웠지만 신학교 교수도, 목사도 아닌 그저 세상의 지혜를 담은 책 몇권으로 조금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평신도 작가가 이런 책을 쓸 자격이나 있는 것인가하는 회의적인 마음이 더 컸다. 진짜 목사와 가짜 목사는 누가 정하는 것이며, 한국 기독교에는 소위 가짜 목사가 얼마나 판을 치길래 진짜 목사를 찾아나서기까지 해야하는 현실을 생각해보니 씁쓸함도 없지 않았다.

저자가 소개하는 7명의 목사들은 모두 각자의 소명대로 성경이 말씀하는 좁은 길을 걷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단과 사이비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온갖 공격과 테러를 무릅쓰는 목사,  사명감과 우선순위를 잃어버리고 세상적인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타락한 목사들에게 가차없이 쓴소리를 하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노숙자를 섬기기 위해 가족에게까지 버림받고 재산도 모두 버리고 자신이 직접 노숙자가 되어 노숙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극단적인 섬김의 삶을 실천하고있는 목사까지 있다. 필자는 이들이 추구하는 목회와 사역에대해 저자처럼 전적으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적어도 이들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좁은 길을 걷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삶과 열정을 바치며 부단히 애쓰는 목사들이라는 사실이다. 교회안의 머릿수 늘리기에 급급하여 사도바울이 배설물로 여긴다는 온갖 잡다한 세상의 지혜를 짬뽕시켜버린, 제정신으로 앉아서 듣고 있기 민망하기까지한 그런 설교들로 무장하여 강단에 서는 목사들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극빈층으로 내려가는 그 모습에서 하늘 영광을 모두 포기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죽기위해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고,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거짓 복음, 이단을 폭로하는 일을 하다 테러로 순교당한 목사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서 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헌신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형교회 한번 만들어서 떵떵거리며 부와 명예를 한번 누려보려고 안달 난 그런 목사들은 이들의 삶을 통해 회개해야 할 것이다.

성경보다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한국 교회, 하나님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경적인 의미의 성장이 아닌 자본을 축적해서 건물을 올리고  교인을 늘리는 외형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한국교회안에 만연해지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걱정하고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도리어 세상을 부패시키고 욕먹는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목사들의 책임이다. 출세지상주의, 성공주의, 물질주의에 물든 한국 목사들의 설교 때문에 성도들은 성경보다 이적을, 성경보다 꿈을, 성경보다 적극적 사고방식을, 성경보다 심리학적 위로와 위안을, 성경보다 돈을, 성경보다 건강과 물질적 축복을 추구하게 되었다. 정성구 목사의 말처럼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추구할 때 한국교회에 희망이 생기고 성도들이 목사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삐걱대는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실망감과 불평만 늘어놓고 있을 수 없는 이유는 그래도 아직 숨어서 모든 세상적인 욕심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곳곳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7인 이상으로 성경적인 목회를 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목사들이 많이 숨어있다. 그들은 이 땅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받을 상급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이들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목사가 희망인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아닌 자신의 욕심의 종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들의 회개와, 더 많은 ‘진짜 목사’들의 성경적인 삶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이땅에 드러나길 기도한다.

차례

  •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다/영등포 노숙자들의 산타클로스 박희돈 목사
  • 예수를 설교하는 삶이 아닌 예수처럼 사는 삶/영혼을 울리는 찬양사역자 김종찬 목사
  • 하나님의 십자가를 나침반으로 삼다/한국 최고의 칼빈학자 정성구 목사
  • 예수의 이름 앞에 비겁함이란 없다/쓴소리도 마다않는 한국교회의 대변인 이억주 목사
  • 빛과 소금의 사명을 실천하다/우상숭배에 대항하는 한국교회의 의인 최흥호 목사
  •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음에 귀 기울여라/기독교 영성회복을 위한 운동가 김태한 목사
  • 순교자의 정신으로 좁은 길을 가다/이단 및 사이비 종교 연구가 탁지원 소장, 탁지일 교수
  • 래디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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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래디컬 (Radical)
    저자: 데이비드 플랫 (David Platt)
    평점: 3/5

    간략한 서평
    일찍이 알고 있었던 책이지만 신앙서적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오렌지색의 겉표지에 “급진적인”을 뜻하는 래디컬 이라는 제목을 달고 서점에 진열되있는 이 책을 보면서 이제 신앙서적들도 이런식으로 한 부라도 더 팔려는 목적으로 시선을 끌기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고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거부감이 들어서 일부러 구입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워낙 여러사람이 이 책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추천을 하기에 일단 구입했다.

    겉표지에 써있듯이 무명의 목사가 쓴 이 책을 관통하는 주된 메세지는  ‘물에 물 탄 듯 변질된 신학과 번영을 약속하는 가짜 복음을 잊으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아마존 종교 베스트셀러 답게 이 책은 매우 대중적인 책이다. 대중간의 소통을 위해 간증과 예화들이 주를 이루는 이 책에서 필자처럼 좀 더 이론적이고 깊은 신학적인 기반까지 기대를 하고 있다면 오산이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도 사실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다루고있는 예수를 따르는데 필요한 절대적인 헌신, 죄에 대한 메세지는 온데간데 없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왜곡된 오늘날의 복음, ‘자기중심적’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작업, 선교와 같은 주제들은 기존에 많이 다루어진 것들이다. 그런 맥락에서 저자가 과연 래디컬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급진적인 내용을 다루었는지, 급진적인 주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물론 예수님의 삶과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 급진적이라는 부분에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지만, 이 사실 조차도 이미 수 많은 작가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다루어진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저자가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그리고 여러번 다루어진 적이 있는) 핵심적인 몇가지 사안을 잘 선별하고 적절한 간증과 예화로 양념을 넣어 자신의 언어로 잘 소통했을 뿐 화려한 색깔을 입은 이 책의  겉모습이 필자에게 안겨줬던 급진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의 그 무언가가 있었다고 하기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주변에 누가 그러던 말이 기억난다. 요즘은 물질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 성공주의 등으로 물든 변질된 복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목사들, 신학자들, 또 그들의 책들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있는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필자의 생각은 이런 분들은 머릿수로나 영향력으로나 아직까지 턱 없이 부족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왜곡된 기독교의 실상을 폭로하고,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세지만 일관성있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미국 뿐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여러 대형교회들만 살펴봐도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교회됨을 많이 상실해 보인다. 오늘날의 교회는 무당굿판인지, 자기계발 세미나인지, 연애의 장인지, 경건한 척 보이기 위해 온갖 위선을 떠는 곳인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명예, 혹은 재산 등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곳인지,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그렇게 높여진 자신의 가치확인을 통하여 만족감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쓰임받았다는 착각에 집단으로 빠지는 곳인지 분간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워낙 이런 분위기가 만연하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 진짜로 위험한 것인지 분별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순종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를 위해 죽기는 커녕 내가 가진 물질조차도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나의 축복과 번영을 비는 내 기도 따위에나 응답해주는 존재로 전락시켜버린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지를 항상 질문하며 겸손한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하는 일은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Chpater 01: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따를 만한 분
    Chpater 02: 복음은 당신의 전부를 원한다
    Chpater 03: ‘나’를 버리는 데서 시작하라
    Chpater 04: 하나님의 원대한 목표
    Chpater 05: 세상 속에 뛰어들어 제자 삼는 공동체
    Chpater 06: 가난한 자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 나눠 주라
    Chpater 07: 다른 길은 없다! 당신이 나서라
    Chpater 08: 죽는 것도 유익함이
    Chpater 09: 당신의 삶을 완전히 바꿀 래디컬 시험

    균형잡힌 기독교

    297655_10100461091835094_856316863_n 제목: 균형 잡힌 기독교 (Balanced Christianity)
    저자: 존 스토트 (John R. Stott)
    평점: 3.5/5

    책을 읽어내려가며
    불과 두 달전 90세의 나이로 별세한 복음주의의 “교황”으로 불리우는 성공회의 대표적인 신부 존 스토트가 로잔 회의가 열린 이듬해인 1975년, “균형 잡힌 기독교” 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복음주의 안에서 보수와 진보 진영의 감정적인 대립, 만연했던 반지성주의, 형식과 자유에 관한 격한 논쟁, 그리고 복음전도에 비해 사회참여에 소홀하다는 비판으로 분열의 조짐이 보이던 시대적인 정황으로 볼 때, 이 책은 매우 적절한 시기에 탄생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1970년대 중반의 이런 시대적인 상황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기독교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이라는 격언을 분명하게 천명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던 저자의 복음주의 전체의 미래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이 녹아 있지만,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균형잡힌 신앙을 통한 영적 성숙을 도모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통찰을 제시한다.

    진보와 보수
    성경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면서도, 다른 것들을 철저하게 비평하는 데 있어서는 급진적인 태도를 가짐으로써 보수와 진보를 독특하게 결합하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금진적 보수주의자들 (Radical Conservatives)가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변화시켜야 할 것과 보수해야할 것을 비판적으로 분별할 줄 아는 지혜야 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마땅한 것이다. 영원하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는 일에는 보수적이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문화는 성경적인 잣대로 끊임없이 비판하고, 급진적인 변화와 개혁을 추구해야한다.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있기도 하다. 신학적으로든 기질적으로든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는 양극화를 피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우리가 강경한 칼빈주의자이면서도 강경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에는 그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 짧은 책에서는 알아내기가 어렵다. 차라리 좀 더 진보적인 칼빈주의자와 진보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써 중간에서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라고 했다면 더 수긍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많은 양극단의 두 신학적 견해를 모두 수용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정확히 와닿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복음전도와 사회 참여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음 전도와 선교활동에 비해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미미하다. “기독교는 천국과 세상을 동시에 다룬다. 인간의 영혼에만 관심을 표명하고 뒷골목에 전혀 관심이 없는 기독교, 그들을 질식시키는 경제적 악조건과 약자로 만드는 사회적 악조건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 기독교는 무의미하다” 라는마틴 루터 킹의 표현처럼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는 지상명령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대체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개개인 마다 받은 부르심을 따라 지역 교회와 지역 사회 전체에 관심을 가지고 봉사하고 여러가지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이 주신 가장 큰 계명을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을 마치며
    상대적으로 본문이 짧고 문체가 가볍기 때문에 술술 읽히는 책이지만 저자가 다루는 주제들의 중요성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당대에 기독교가 직면한 제일 중요한 신학적, 사회적, 문화적 이슈들을 이해하기 쉽고 호소력 짙은 대중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 탁월한 은사가 있는 저자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일치시켜야 할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며, 자유를 부여해야할 비본질적인 것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오는 논쟁과 그로부터 오는 긴장감을 얼마나 늦출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역설적이지만 때때로 복음주의 안에서의 다른 견해를 가진 집단의 비판적인 견제의 목소리가 복음주의 전체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례
    일치, 자유, 사랑
    지성과 감성
    보수와 진보
    형식과 자유
    복음전도화 사회참여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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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공부하는 그리스도인 (The Outrageous Idea of Academic Faithfulness) 
    저자도널드 오피츠 (Donald Opitz)/데릭 멜러비(Derek Mlleby)
    평점: 3.5/5

    책을 읽어내려가며
    “스펙을 위해 공부할 것인가? 소명을 위해 공부할 것인가?” 라고 큼지막하게 겉표지에 쓰인 문구를 보고 이 책은 공부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채 그저 세속적인 성공과 부, 명예만을 목표로 삼고 학업에 매달리는 학생들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에 이 책을 시작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아마 필자는 뚜렷한 소명을 가지고 학업을 하고 있음을 확신한 교만한 마음 때문이 알게 모르게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이 책을 펼쳐들게된 것도 뚜렷한 소명과 건전한 동기없이 그저 열심히만 하는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The Outrageous Idea of Academic Faithfulness” 라는 이 책의 영문 원제는 마크 놀(Mark Noll)과 함께 복음주의 진영의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학자인 조지 마스덴 (George Marsden)이 1997년 출간한 “기독교적 학문 연구@현대 학문 세계”(The Outrageous Idea of Christian Scholarship)이라는 책의 영문 제목을 따라한 것이다. 저자는 ‘무모한’(Outrageous)라는 단어가 마음이 들어서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아마 ‘학문적 신실함’을 외치며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역설하는 저자조차도 그 일은 무모하고 황당무계 할만큼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하고자 하는 시도인 듯 생각된다. 그런 무모한 작업을 시도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고, 복잡하게 얽힌 여러가지 부분들을 포괄적이지만 독자들에게 충분히 도전을 줄 수 있을만큼 주요 문제들에 대해 좋은 논의를 펼쳤다고 평하고 싶다.

    책의 핵심 내용
    저자의 주된 관심은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고 평생학습을 훈련하는 일에 깨어 있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아 특정한 삶의 방식을 익히게 된다.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복음으로 마음이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당신은 그저 주변 문화를 따라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기독교적 관점을 개발하는 일의 중요성을 모든 그리스도인들 학생들이 인식하여 세속 학문의 통찰을 꼼꼼하게 비평하고 기독교적 관점으로 통합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학문의 근본적인 도전이요, 그리스도인 학생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임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겸손이라는 덕목을 통하여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단순한 학문 연구의 차원을 넘어서 제자도로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르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 계발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며 저자는 게슈탈트(gestalt)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통합된 전체에 대한 이해’라는 뜻의 이 단어는 ‘삶의 가이드 역학을 하는, 한사람이 가진 포괄적인 신념의 틀’ 혹은 ‘어떤 이야기나 일련의 전제들이 바탕이 되어 나타나는 헌신, 마음의 근본적인 방향성’으로 정의되는 세계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사람이 가진 게슈탈트는 그 사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렇게 형성된 세계관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전체 그림을 알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반대로 깨진 유리조각을 보고 깨지기 전의 멀쩡한 전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듯 부분을 연구하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학, 예술, 인문학 등의 학문 연구도 전체에 속한 조각과 파편을 공부하는 일이며, 그 일을 통하여 온전한 통찿과 일관성, 깊이있는 의미의 일부를 암시적으로 알 수 있다. 일관된 기독교 세계관 계발에 노력을 기울이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에게 이 사실은 학업연구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지성/학문
    성경은 지성이 중요하며, 우리의 사고 방식 가운데 특정한 패턴과 우선순위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적 지성은 본질상 관계적이므로 우리의 정체성과 소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학자와 학생에게 학문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부여하신 질서를 기대하고 발견하며, 복잡함과 신비에 놀라고, 하나님이 심어 두신 선과 잠재력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일부이기에, 학문은 창조 세계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충실하게 이해할 목적으로 개발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통합된 삶이다. 학문이 그저 지적 희열을 좇는 차원에서 머무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사랑은 물론, 창조 세계를 돌보고 건강한 공동체를 개발하는 방편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지성의 개발은 성경의 주요 주제를 꿰뚫는 통찰력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성경공부나 기독교적 관점 개발에 도움을 주는 서적을 통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인 학생은 성경말씀과 세상의 학문에 동시에 귀를 기울이는 ‘이중적인 귀 기울임’이 필요하다.

    글을 마치며
    학업을 본분으로 삼는 많은 그리스도인 학생들에게 이 책은 많은 유익함을 준다. 저자도 밝혔듯이 이 책의 주요 독자층은 진로와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하는 고등학교 졸업반에서 새내기 대학생들이다. 저자는 한 개인이 의미와 윤리성에 대한 본인의 신념을 정립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접어든 19세에서 26세 사이의 대학생들에게 기독교 도서들에서 흔히 다루어지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학업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찰해볼 수 있도록 도전을 준다. 하지만 자녀의 대학 생활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측면에서 학부모에게도 유익할 수 있으며, 신앙과 학문, 문화의 연결방식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학생들을 상담하고 지도하는  목회자와 그리스도인 교수들에게도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심오한 주제들과 신학적인 내용들을 심층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저자의 개인적인 간증, 인터뷰, 부록으로 담긴 편지들 등을 통해서 실용적인 부분을 강조하려고 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학문적 신실함을 추구하는 일에 좀 더 이론적인 근거를 찾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턱 없이 부족할 수 있기에 더 심도있는 기독교 세계관 관련 서적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지 벌써 4년차에 접어든 필자도 저자가 말하는 “학문적 신실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 되었고, 이 책을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쯤 접하지 못해 ‘그저 열심히만 하는’ 학생으로 대학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사실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차례
    1.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2. 바벨론 U
    3.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4. 이야기 구조의 삶
    5. 물고기 눈 학습
    6. 4I학습
    7. 무모한 생각의 구체화
    8. 미끄럼틀과 사다리

    무례한 기독교: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309059_10100458468896484_1793231792_n 제목: 무례한 기독교: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Uncommon 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저자: 리처드 마우 (Richard J. Mouw)

    평점: 4/5

    책을 읽어내려가며  

    저자인 리처드 마우는 칼빈주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신학자이지만 다른 칼빈주의자들에 비해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며, 재세례파와 오순절파에도 훨씬 더 우호적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이 만연하고 다분히 근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 교회에서는 어쩌면 거부감이 들수도 있을 법한 인물이다. 필자도 그런 선입견을 어느정도 가지고 이 책을 펼쳤지만 곧 그가 복음적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보수적 신앙의 소유자임을 느꼈을 뿐 아니라 그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론, 그리고 오늘날의 기독교의 “무례한” 모습들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걱정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물론 저자의 낙태에 대한 견해와 같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민감한 주장들도 없지 않아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다른 책들을 읽을 때보다 더 비판적인 시각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일독한 듯 하다.

    책의 핵심 내용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문화와 종교에 속한 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정중하고 친절하며 관용하는 태도 즉 기독교적 교양과 예절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범람하는 문화적, 종교적 다원주의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책의 제목이 잘 반영하듯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비일상적인 정중함” (Uncommon Decency)으로 교양있는 그리스도인들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적 시민교양은 그로 말미암는 전도의 열매나 정치적 효과를 떠나서 그 자체로 귀중한 가치가 있다. 남을 존중하고 좀 더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이며 성화되어져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삶에서 자연스레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문화가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사회에서 타락한 세속적인 사상들로 오염된 세상과의 타협을 하지않고 기독교 신념을 지켜내겠다는 명분아래 저질러지는 많은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일 뿐 아니라 이기적이고 무례하게까지 비추어질 수 있는 부분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지각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민해보았을 법한 신실한 믿음과 공손함은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예의바른 사람은 종종 강한 신념이 없고,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예의가 없다라는위대한 종교사가인 마틴 마티의 지적에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교양있는 태도에 우리의 신념에 대한 “강렬한 정열”을 결합할 길을 모색해 신념있는 시민 교양(convicted civility)를 계발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단언할 뿐 아니라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할 때에 우리는 더 성숙해지고 우리의 기독교적인 신념이 더욱 강해질 수 있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다원주의와 그리스도인의 자세

    “다원주의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 이라는 이 책의 소제목에서 암시하듯 저자는 책의 상당부분을 다원주의와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관한 논의에 할애한다. 다원주의를 타락하고 우상숭배에 물든 오늘날의 세상을 지배하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부정적인 그 어떤 것으로만 바라본 기존의 많은 신학자들에 비해 저자는 다원주의의 우려할 만한 많은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이 많음을 언급한다. 어쩌면 근본적인 견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막론하고 불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정중한 태도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주의깊게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한다고 역설하는 저자에게서 자연스레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특별히 저자는 다양성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하며 성경의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지 않은 우상숭배적인 사상, 종교, 문화들을 배격하고 정치적 수단을 동원하여 말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계시에 비추어 문화적 차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며 복음 전도의 과업에도 핵심적인 요건임을 설명한다. 다른 사상, 종교, 문화의 틀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문화적 다양성으로 부터 위협을 느끼거나 파괴해야할 그 무엇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성화시켜야 할 부분이다.

    다원주의 세계에서의 기독교적 리더쉽  

    다원주의 세계에서 특별히 필요한 리더쉽의 역사와 이론의 대가인 제임스 맥그리거 번즈가 주창한 “변혁적 리더쉽”이다. 이는 지도자와 추종자 모두 상호 관계에 의해 기꺼이 변화되고자 하는 경우에 생겨난다. 변혁적 리더쉽의 요건은 진심으로 타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가장 깊은 관심사에 대한 관점에 감정이입을 통한 열린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진정한 경청은 우리가 듣는 내용에 의해 기꺼이 변화되려는 자세를 의미하며 스스로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 없이는 다른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아이러니한 진리를 변혁적 리더쉽을 추구함으로 추구할 수 있다.  종종 타인들을 변화시키려고만 하지 자신이 변화되는 일은 거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어도 많은 불신자들에게는 그렇게 느낄 것이다) 경종을 울리는 진리가 아닐 수 없다.

    글을 마치며  

    성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은 타인에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온유함과 존경을 베풀 책임을 결코 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친절과 온유함을 제쳐놓을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상대가 설사 나치와 사탄 숭배자, 합벅적인 근친상간을 두둔하는자, 동성애를 지지하는 자, 혹은 교회내의 이단들과 같이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인이 배격해온 부류의 사람일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이요 여전히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수 있으며, 그들이 멋진 피조물로 활짝 피어나서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사랑을 품고 대해야 한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외부 세계를 향해 복음의 메세지를 아무리 외쳐대도 우리가 먼저 복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존재로 변화되고 있고,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복음의 메세지의 신빙성은 떨어질 것이며, 우리가 복음의 영광의 빛을 드리우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적 교양을 계발하는 일은 복음 전도의 의미로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로써 타락한 현재의 모습에서 성숙해져 점점 온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성화의 한 모습이라는 관점으로 보았을 때 더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차례

    1. 신념 있는 시민 교양: 신실한 믿음과 공손함은 양립할 수 있는가?

    2. 기독교적 시민교양에 대한 오해

    3. 기독교적 시민교양의 변호

    4.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말하기: 교양을 갖춘 언어 생활의 중요성

    5. 열린 마음: 교양있는 태도의 중요성

    6. 다원주의의 장점

    7. 시민교양과 성(性)

    8. 다른 종교의 도전

    9. 다원주의 세계에서의 기독교적 리더십

    10. “다른 한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시민교양의 한계

    11. 지옥은 무례한 개념인가?

    12. 아브라함 카이퍼, 테레사 수녀를 만나다: 승리주의의 문제

    13. 느린 하나님을 섬기기: 시민교양과 종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