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부모를 떠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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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유부남이 되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결혼에 관한 여러 기독교 서적 및 자료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것들을 읽으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국 목사님들 혹은 가정사역자들이 썼다는 책들에 하나같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는 구절이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구절은  외국저자들의 저서들에 비해 한국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책들 속에 훨씬 더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경향을 보았다. 특히 이 구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라는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유교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결혼을 한 후에도 부모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경우가 많아 결혼생활이 어려워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일을 확실하게 해야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라는 설명과 함께 남자가 제대로 부모를 떠나지 못했을 때에 어떤 어려움들이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항상 뒤따라온다. 그리고 다양한 실질적인 지침들도 알려준다. 이 모든 시도에 대한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을 하면 할 수록 남자가 부모로부터 온전하게 독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 한다라는 주장에 근거로 이용되는 이 구절의 진의는 다른 곳에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한마디로 이런식의 해석은 유교적인 색채가 강한 한국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탄생한 본질을 빗겨간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석 때문에 이 구절에 숨겨진 더 깊은 의미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는 창세기 2:24의 말씀은 “남자야 내가 너한테 명령하는데 부모님을 꼭 떠나서 네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뤄라“라는 뉘앙스가 아니다. 그보다는 결혼을 하게되면 “남자는 자연스럽게 자기부모를 떠나게 될 것이며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남자보고 “너 꼭 부모를 제대로 떠나서 온전히 독립된 가정을 꾸려야한다”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상관없이 남자는 결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부모를 떠나게 될 것이고 온전히 독립된 가정을 꾸리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쉬운 성경도 “… 아내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라는 명령조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썼고, KJV와 NIV로 비롯한 여러 영문번역을 살펴보아도 명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번역은 없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아담은 이 땅에서 육체의 부모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굳이 부모를 이야기해야한다면 아담의 부모는 그를 손수 지으신 하나님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부모를 떠나라고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떠나라는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된다. 하지만 아담이 예수를 모형하는 인물임을 기억한다면, 이 구절은 훗날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모이신 하나님을 떠나 신부인 교회와 연합하여 교회를 구원하시는 그림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신부된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부모를 떠나야하는 고통을 감내하셔야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담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창세기 2:24 뿐 아니라 에베소서에서도 확인된다:

…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5:31-32-

“부모를 떠나” 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창세기 2:24에 있는 “부모를 떠나”라는 구절은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가 죄인들을 구원하게 되실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를 아담과 하와의 결혼하는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다. 이 구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담겨있는 복된 구원의 메시지이지, “부모를 제대로 떠나서 아내를 힘들게 하지말고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어라”라는 명령이 담긴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부모되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이라는 고통을 경험하신 예수님의 아픔을 결혼이라는 제도속에서 모든 남자가 어떤식으로든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자기 자신을 내어드려야했던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어질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하여 연단되어지고 천국백성으로 지어져 갈 것임을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3

일사각오를 빕니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저를 위해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 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여!

저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제 발 아래에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2

고난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 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 1

제 영혼을 주님께

오, 주님 예수여!

제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제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제 목숨이 끊어질 때

제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저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저의 고향입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제 발을 씻어서

저로 하여금 하늘 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저를 깨끗하게 하셔서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제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John Lennox의 2012 베리타스 포럼 강연: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비이성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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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 대학의 수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존 레녹스 (John Lennox)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지성인 중 하나이다. 그는 박사 학위만 3개를 취득했고 그 중에 하나는 옥스포드 대학, 또 하나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취득했다. 또한 언어에도 탁월한 소질이 있어 4-5개정도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가히 천재라 불릴만한 인물이다. 그는 옥스포드에서 학부생으로 수학하던 시절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CS Lewis의 마지막 강의를 들었던 학생 중 한명이며, 그 자신도 현재 스티븐 호킹 (Stephen Hawking) 이나 피터 싱어 (Peter Singer) ,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와 같은 쟁쟁한 무신론자들에게 빈틈없는 논리로 기독교를 변호하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가이다.

필자도 2011년 캘리포니아 남가주대학 (USC) 캠퍼스에서 ‘Same evidence, different conclusions: Is “objective belief” an oxymoron?’ 이라는 주제로 있었던 베리타스 포럼 강연과 2014년 갈보리 채플 (Calvary Chapel) 에서 있었던 존 레녹스의 강연을 직접 들은 경험이 있다. 1945년생인 그는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며 언제나 위트가 넘쳐나는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는 힘이있는 인물이였음을 생생히 기억한다.

2012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비이성적인가? (‘Is belief in the supernatural irrational?’) 라는 주제로 베리타스 포럼이 주최하여 강연을 했다. 초자연 (supernatural)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시작으로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펼쳐나간다. 그는 또한 오늘날 저돌적인 신무신론자 (new atheists)들이 왜곡한 기독교의 입장들을 하나 하나 짚어가면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했고,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레녹스의 하버드 대학 강연의 중요한 포인트 몇가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이성적인 과학 vs 비이성적인 종교?

수 많은 과격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등에 업고 종교는 과학에 무지하고 객관적인 증거와 논리를 따질 줄 모르는 비이성적인 사람들만 믿는 체계라는 식으로 논쟁을 끌고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레녹스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훌륭한 과학자들을 언급하면서 이 논쟁은 종교 vs. 과학의 구도가 아니라 자연주의 (Naturalism) vs. 유신론 (Theism)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오히려 그는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맥스웰과 같은 현대과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위대한 과학자들이 신실한 신앙인이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며 역사적으로 유신론이야 말로 현대과학을 가능케 했던 사고체계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유신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그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하고 설명할 수 있는 질서정연한 법칙을 신이 자연세계에 부여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현대과학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레녹스는 더 나아가서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이 진리의 추구에 있어서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레녹스가 설명하는 논증이 소위 말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인  앨빈 플란팅가 (Alvin Plantinga)가 주창한 Evolutionary Argument Against Naturalism (EAAN) 이다. 이 논증은 사실 CS Lewis가 자신의 책 <기적>에서 이미 다룬 내용을 플란팅가가 좀 더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킨 것인데 계속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마음이 가장 하등한 동물에서 발전돼 나온 것이라면 그 마음에서 나온 대단한 결론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던 다윈에게 까지 올라가게 된다. 레녹스의 핵심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말하는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은 살아남기위해 생존에 가장 적합하게 진화하는 것이지 진리를 가장 잘 포착하는 형태로 진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 생물학의 큰 기둥인 신다윈주의 진화론은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매우 불편한 관계 또는 양립 불가능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플랜팅가의 EAAN 논증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이곳을 참조.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자들은 우주가 닫힌 체계 (closed-system)라고 말하며, 우주의 모든 것이 물리,화학적인 작용들로 환원된다고 설명하기 때문에, 모든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이론들과 수학공식들같은 비물리적인 것들 조차도 물리, 화학적인 작용들의 결과라고 주장해야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는 점을 레녹스는 잊지않고 강조한다.

자연세계는 닫힌 체계 (closed system)인가?

무신론자들은 종종 자연세계는 닫힌 체계이고, 자연은 이미 밝혀진 자연법칙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기때문에 기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이나,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사건같은 성경에 기록된 여러 기적들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레녹스는 매우 위트있게 설명해버린다. 금고에 1000불을 어제 한번, 또 오늘 한번 넣어놓고 내일 금고를 열었을 때 500불만 들어있다면 그것은 사칙연산법칙이 깨져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금고를 열고 훔쳐간 것임이 분명한 것과 같이, 우주안에서 부활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자연법칙이 깨진 것이 아니라, 우주를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우주밖에서 이러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조정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 강연에서 가장 위트있는 비유가 아니였나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주장을 할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법칙을 무너뜨리는 어떤 다른 자연적인 방법으로 부활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밖에서 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조정했다는 레녹스의 설명은 기적에 대한 많은 오해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설명인 듯 하다.

과학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20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철학자였던 버트란트 러셀 (Bertrand Russell)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과학이 알려줄 수 없는 것은 인류가 알 수 없다’. 과학만이 지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러셀은 자신이 한 이 주장이 과학적 주장이 아님을 생각하지 못했고, 망신살 뻗칠만한 논리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러셀보다는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답할 수 없는 과학의 한계를 인식해야한다’고 말한 노벨상 수상자 피터 메다와 (Sir Peter Medawar) 의 말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일 것이다.

매케니즘과 에이전트

레녹스가 강조하는 내용 중에 또 하나는 메케니즘과 에이전트는 다르며 각각 별개의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포드 자동차를 설명하기 위해선 엔진의 작동원리와 같은 메케니즘을 다루는 설명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이 메커니즘을 설계한 헨리포드라는 사람을 설명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말은 결국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여 예전에는 설명될 수 없었던 자연현상들 (메케니즘)이 설명가능하게 되어진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그 자연현상들을 설계했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 (에이전트)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레녹스가 2008 년에 옥스포드 대학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리처드 도킨스와 벌였던 논쟁에서도 줄기차게 설명했던 부분이다.

십자가

문을 열다

우리가 십자가를 얼마나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흔히 부르는 찬양 속에 나오는 십자가라는 단어를 근대적 처형법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로 바꾸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교수대 교수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오 너의 슬픈 세상 눈물 너의 쌓인 아픔을
사형대 앞에 너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교도소의 길을 걷는 자에게

예수 당시의 십자가가 권력에 대항한 정치범들이 겪는 처형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개사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바뀐 가사에 강한 거부감과 불쾌감, 또는 기괴함을 느낀다. 심지어는 거룩한 찬양이 모독당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우리가 십자가를 달콤하고 평온한 사랑과 은혜의 상징으로만 상상하고, 십자가가 원래 뜻하던 죽음과 고통, 오욕과 공포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감옥과 사형대는 악랄하고 더러운 범죄자들을 위한 것이지, 거룩한 신앙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말한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수모와 고통이 우리에게는 승리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상징하는 잔혹한 폭력과 죽음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대신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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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철학자 & 과학자

대다수의 영향력있는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비기독교인 혹은 무신론자들이였다고 많이 생각들한다. 하지만 한 세대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은 대부분 무신론자였다는 식의 통념은 사실 편견에 쌓인, 아니 무지하기까지 한 생각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이나 버트란드 러셀과 같은 유명한 비기독교인 과학자/철학자도 있지만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살펴보면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1. 기독교인 철학자
사실 중세시대 때까지만 해도 영향력있는 철학자들은 대부분 카톨릭 신부, 신학자들이였다. 그 시대는 신학이 곧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7세기에 들어 계몽주의가 유럽에서 급부상하면서 이런 분위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기독교 철학자들은 발 딛고 설 자리도 없을만큼 초라한 모습이였고 니체나 마르크스, 프로이드, 러셀 등과 같은 무신론 사상을 기반으로 한 철학자들이 판을 쳤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철학자 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알빈 플란팅가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같이 이 세대를 대표하는 거물급 철학자가 기독교 진영에서 배출되면서 “기독교 철학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심심풀이로 한글자막을 달아본 아래 동영상을 참조하라. 기독교 진영의 최고의 논객으로 평가받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바이올라 대학의 윌리엄 레인 크레그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 분과의 공개토론을 두려워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 기독교인 과학자
아래에는 과학에서 하나의 분야를 창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 중 창조론을 지지하는 기독교인들만 모아서 정리해 놓은 것이다.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라는 창조론을 지지하는 보수 기독교 단체로부터 얻은 자료이니 그들이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들 너무나도 유명한 과학자들이지만 비전공자들도 알만한 인문들로는 루이 파스퇴르, 아이작 뉴턴, 요한 케플러, 멕스웰, 앙리 파브르, 멘델, 파스칼, 켈빈, 파라데이 등이 있다.

 SCIENTIFIC DISCIPLINES ESTABLISHED BY CREATIONIST SCIENTISTS

                   DISCIPLINE                                SCIENTIST

ANTISEPTIC SURGERY                         JOSEPH LISTER (1827-1912)
BACTERIOLOGY                                  LOUIS PASTEUR (1822-1895)
CALCULUS                                         ISAAC NEWTON (1642-1727)
CELESTIAL MECHANICS                      JOHANN KEPLER (1571-1630)
CHEMISTRY                                        ROBERT BOYLE (1627-1691)
COMPARATIVE ANATOMY                 GEORGES CUVIER (1769-1832)
COMPUTER SCIENCE                         CHARLES BABBAGE (1792-1871)
DIMENSIONAL ANALYSIS                   LORD RAYLEIGH (1842-1919)
DYNAMICS                                        ISAAC NEWTON (1642-1727)
ELECTRONICS                                   JOHN AMBROSE FLEMING (1849-1945)
ELECTRODYNAMICS                           JAMES CLERK MAXWELL (1831-1879)
ELECTRO-MAGNETICS                      MICHAEL FARADAY (1791-1867)
ENERGETICS                                     LORD KELVIN (1824-1907)
ENTOMOLOGY OF LIVING INSECTS    HENRI FABRE (1823-1915)
FIELD THEORY                                  MICHAEL FARADAY (1791-1867)
FLUID MECHANICS                            GEORGE STOKES (1819-1903)
GALACTIC ASTRONOMY                    WILLIAM HERSCHEL (1738-1822)
GAS DYNAMICS                                 ROBERT BOYLE (1627-1691)
GENETICS                                         GREGOR MENDEL (1822-1884)
GLACIAL GEOLOGY                           LOUIS AGASSIZ (1807-1873)
GYNECOLOGY                                   JAMES SIMPSON (1811-1870)
HYDRAULICS                                     LEONARDO DA VINCI (1452-1519)
HYDROGRAPHY                                 MATTHEW MAURY (1806-1873)
HYDROSTATICS                                 BLAISE PASCAL (1623-1662)
ICHTHYOLOGY                                  LOUIS AGASSIZ (1807-1873)
ISOTOPIC CHEMISTRY                        WILLIAM RAMSAY (1852-1916)
MODEL ANALYSIS                              LORD RAYLEIGH (1842-1919)
NATURAL HISTORY                            JOHN RAY (1627-1705)
NON-EUCLIDEAN GEOMETRY             BERNHARD RIEMANN (1826- 1866)
OCEANOGRAPHY                               MATTHEW MAURY (1806-1873)
OPTICAL MINERALOGY                       DAVID BREWSTER (1781-1868)
PALEONTOLOGY                                JOHN WOODWARD (1665-1728)
PATHOLOGY                                      RUDOLPH VIRCHOW (1821-1902)
PHYSICAL ASTRONOMY                      JOHANN KEPLER (1571-1630)
REVERSIBLE THERMODYNAMICS          JAMES JOULE (1818-1889)
STATISTICAL THERMODYNAMICS        JAMES CLERK MAXWELL (1831-1879)
STRATIGRAPHY                                  NICHOLAS STENO (1631-1686)
SYSTEMATIC BIOLOGY                        CAROLUS LINNAEUS (1707-1778)
THERMODYNAMICS                            LORD KELVIN (1824-1907)
THERMOKINETICS                               HUMPHREY DAVY (1778-1829)
VERTEBRATE PALEONTOLOGY             GEORGES CUVIER (1769-1832)

위대한 발명/발견 등을 이루어낸 기독교인 과학자들도 있다:

NOTABLE INVENTIONS, DISCOVERIES OR DEVELOPMENTS BY CREATIONIST SCIENTISTS
           CONTRIBUTION                                     SCIENTIST
ABSOLUTE TEMPERATURE SCALE                   LORD KELVIN (1824-1907)
ACTUARIAL TABLES                                      CHARLES BABBAGE (1792-1871)
BAROMETER                                                 BLAISE PASCAL (1623-1662)
BIOGENESIS LAW                                          LOUIS PASTEUR (1822-1895)
CALCULATING MACHINE                              CHARLES BABBAGE (1792-1871)
CHLOROFORM                                             JAMES SIMPSON (1811-1870)
CLASSIFICATION SYSTEM                             CAROLUS LINNAEUS (1707-1778)
DOUBLE STARS                                            WILLIAM HERSCHEL (1738-1822)
ELECTRIC GENERATOR                                 MICHAEL FARADAY (1791-1867)
ELECTRIC MOTOR                                        JOSEPH HENRY (1797-1878)
EPHEMERIS TABLES                                      JOHANN KEPLER (1571-1630)
FERMENTATION CONTROL                           LOUIS PASTEUR (1822-1895)
GALVANOMETER                                         JOSEPH HENRY (1797-1878)
GLOBAL STAR CATALOG                             JOHN HERSCHEL (1792-1871)
INERT GASES                                               WILLIAM RAMSAY (1852-1916)
KALEIDOSCOPE                                           DAVID BREWSTER (1781-1868)
LAW OF GRAVITY                                        ISAAC NEWTON (1642-1727)
MINE SAFETY LAMP                                     HUMPHREY DAVY (1778-1829)
PASTEURIZATION                                        LOUIS PASTEUR (1822-1895)
REFLECTING TELESCOPE                              ISAAC NEWTON (1642-1727)
SCIENTIFIC METHOD                                    FRANCIS BACON (1561-1626)
SELF-INDUCTION                                        JOSEPH HENRY (1797-1878)
TELEGRAPH                                                 SAMUEL F.B. MORSE (1791-1872)
THERMIONIC VALVE                                    AMBROSE FLEMING (1849-1945)
TRANS-ATLANTIC CABLE                            LORD KELVIN (1824-1907)
VACCINATION & IMMUNIZATION                 LOUIS PASTEUR (1822-1895)

더 많은 인물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하라.

SDG 개혁신앙 연구회 추천 도서

SDG 개혁신앙 연구회 추천 도서
-성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

■ 기독교 고전
신의 도성/ 자유의지론/ 참회록 / 삼위일체 / 시간과 영원 / 어거스틴
기독교 초기 교부 작품
기독교 강요 / 설교 / 서신들 / 존 칼빈
종교개혁 3대 논문 / 설교 / 루터
사무엘 러더포드의 서한집 / 사무엘 러더포드
그리스도를 본받아 / 토마스 아켐퍼스
신학의 체계 / 토마스 왓슨
천로역정 / 존 번연
신앙과 정서 / 조나단 에드워즈
영적 사고방식 / 존 오웬
인간의 전적타락 / 아더 핑크
팡세 / 파스칼
■ 신앙고백서 및 교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 박윤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 A. A 핫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 R. C 스프로울
장로교인이 믿는 신조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현대적 해설 / 클락, 고든 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 G. I 윌리암슨
성경 소요리문답해설 / 토마스 빈센트
개혁주의 신앙백서 : 소요리문답강해 제1-107문 / G. I 윌리암슨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 고려서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ⅠⅡ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해설서 / 김은수
소요리문답 강해 / 최낙재
기독교 교리강론 / 토마스 카트라이트
52주 완성 소요리문답 / 정기화
(만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 백금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강해 / 김헌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강해 / 이승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 G.I 윌리암스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시리즈 / 마틴 로이드 존스
세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 이형기
교리를 알면 신앙이 자란다 / 최병규

■ 교의학 & 조직신학
개혁교의학개요 / 하나님의 큰 일 / 헤르만 바빙크
교의학개론 / 핸드리쿠스 베르코프
종교개혁후 개혁주의 교의학 / 리차드 A. 뮐러
개혁파 정통 교의학 / 하인리히 헤페
개혁교의학 / 유해무
교의학 서론 / 신복윤
조직신학 / 루이스 벌콥
조직신학 / 존 머레이
조직신학 / 찰스 핫지
최신 조직신학 / 로버트 레이몬드 L
조직신학 편람 / 김영규
조직신학 서론 / 개혁주의 변증학 / 코넬리우스 반틸
개혁주의 속죄론 / 프란시스 튜레틴
구원의 계획 / 벤자민 B. 워필드
알기쉬운 예정론 / R. C 스프로울

■ 칼빈주의 & 개혁신앙
칼빈주의 5대 교리 / 에드윈 h. 팔마
칼빈주의 강연 / 칼빈주의 / 하나님께 가까이 / 아브라함 카이퍼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들 / 신복윤
개혁파신앙이란 무엇인가 / 마키다 요시카즈
개혁주의 신학연구 / 로레인 뵈트너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총서 시리즈 / 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 / 김영규
개혁신앙 강좌 시리즈(10) / 성약출판사
칼빈주의 / 조엘 비키
개혁신학의 광맥, 개혁신학의 정수, 개혁신학의 전망 / 김재성
개혁신앙과 현대사상 / 코넬리우스 반틸
전환기의 개혁신학 / 이승구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D 스틸, C 토마스
종교개혁과 개혁신앙 / 로버트 갓프리 외
개혁신앙으로 돌아가라 / 김홍만
개혁신앙시리즈 / 생명의 말씀사
칼빈과 개혁신앙 / 김은수
21C 세계관과 개혁신앙 / 김영한
존 맥아더의 솔라 시리즈 / 존 맥아더
개혁 그리스도인과 신앙고백의 특징 / J. 캄파위스
코람데오 시리즈 / 복있는 사람

■ 청교도
개혁주의 청교도 영성 :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보여 주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 연구 / 조엘 비키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 로이드 존스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 현대인을 위한 청교도 신앙 연구 / 존 오웬
개혁주의 청교도 영성 / 청교도 전도 : 성경적 접근 / 조엘 비키
청교도 작품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 / 돈 키슬러
청교도 이야기 : 교회사를 빛낸 영적 거장들의 발자취 / 오덕교
청교도 언약사상 : 개혁운동의 힘 / 원종천
청교도의 소망 : 부흥과 세계 선교를 향한 청교도의 열정 / 이안 머리
(청교도의 황태자)죤 오웬 / 앤드류 톰슨
그리스도의 영광 / 죄 죽임 /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 / 성찬 설교 / 존 오웬
죽임당한 어린양 / 거듭남의 본질 / 스테판 차녹
십자가 아래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상한 심령으로 서라 / 경외함의 진수 / 존 번연
신학의 정수 / 윌리암 에임스
유사 그리스도인 / 매튜 미드
영광스러운 부르심 / 리챠드 십스
확신,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 토마스 브룩스
산상수훈 / 십계명 / 주기도문 해설 / 묵상 / 토마스 왓슨
돌이켜 회개하라/ 회개의 참된 의미 / 조셉 얼라인
회심 / 참된 목자 / 리차드 백스터
성령론 / 신앙 감정론 /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 / 놀라운 회심 이야기 / 조나단 에드워즈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 / 칭의 교리의 진수 / 제임스 뷰캐넌
하나님의 주권 / 성경은 언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가 / 당신은 진짜 거듭났는가 : 당신의 거듭남의 진실성 여부를 확증해줄 진단서 / 하나님의 언약 / 구원의 교리 / 아더 핑크
목회자 후보생에게 / 목회자들을 위하여 / 설교, 강해 / 스펄젼
거룩 / 구원의 확신 / J. C 라일

■ 기독교 역사 및 역사 신학
서양기독교역사 / 얼 E. 케인즈
기독교 교회사 / 한국기독교의 재인식 / 김영재
한국 장로교회사 / 양낙흥
한국 장로교 신학사상 / 현대신학 해설 / 간하배(Conn, Havie M)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앙 / 서창원
종교개혁 전야 / 한국 교회친일파 전통 /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 최덕성
종교개혁사 / 베인턴 롤란스
종교개혁사 / 오덕교
개혁교회사 / 주도홍
핵심요해 교회사 가이드 / 심창섭, 박상봉
미국, 캐나다 기독교 역사 / 마크 A. 놀
중세교회사 / 라은성
20세기 신학 / 스텐리 그랜츠
현대교회문제 / 김효성
기독교와 자유주의 / 기독교와 현대사상 / 그레샴 메이쳔
(교회사 안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 / 해롤드 O.J 브라운
개혁주의 시리즈(남부개혁주의 전통과 신정통신학 등) / 데이비드 웰스
프란시스 쉐퍼 전집 / 프란시스 쉐퍼
박윤선의 개혁신앙 연구 / 장동민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 박용규
포스트모던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 / 마크 놀, 데이비드 웰즈
근본주의와 미국 문화 /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 조지 마스든
믿음의 거장 시리즈 / 넥서스CROSS

■ 올바른 기독교적 안목과 통찰을 제공하는 책들
데이비드 웰즈 4부작(신학실종 / 거룩하신 하나님 / 윤리 실종 / 위대하신 그리스도) 시리즈 / 데이비드 웰즈
마이클 호튼 시리즈(세상의 포로된 교회 /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 언약신학 / 기독교적 세계관 / 복음이 이끄는 교회 / 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 보는 기독교 핵심 /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 /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 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 / 마이클 호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 / 무질서한 은사주의 / 분별력 / 진리 전쟁 / 구원이란 무엇인가 / 존 맥아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 / J. I 패커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 / 삶을 허비하지 말라 / 진리의 영웅들 / 존 파이퍼
분열된 복음주의 /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 부흥과 부흥주의 / 오래된 복음주의 / 이안 머리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 / 조엘 비키
심리학,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옥성호
삶을 아는 지식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나를 깨운다 / 싱클레어 퍼거슨
부흥 / 성경적 찬양 / 타협할 수 없는 진리 / 로이드 존스
나를 따르라 / 본 회퍼
신앙클리닉 / 믿음의 본질 / 평신도를 위한 신학 입문 / 박영선
개혁해가는 교회 / 잘 다스리는 장로 / 허순길
기적은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 / 리처드 개핀
잘못된 기독교 분별시리즈 / 부흥과 개혁사

■ 가정
하나님의 방식으로 자녀 키우기 / 존 맥아더
언약자손으로 양육하라 / 가정예배(모범) / 조엘 비키
결혼신학 / 존 파이퍼
가족 / 로이드 존스
혼인 가정과 교회 / 김홍전
이혼 / 데이비드 엥겔스마

■ (출판 서적 중에) 꼭 읽어야 할 믿음의 위인전
마틴 루터
존 칼빈
존 낙스
츠빙글리
블링거
사무엘 러더포드
존 번연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찰스 스펄전
로이드 존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헨리 마틴
로버트 맥체인
메이첸
박윤선
주기철

■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되는 주석 및 강해(설교)집
칼빈의 성경 주석 및 설교
루터의 성경 주석 및 설교
윌리암 헨드릭슨 주석
매튜 헨리 주석
김홍전 목사 성경 강해
스펄젼 성경 강해
아더 핑크 성경 강해
로이드 존스 성경 강해

God-shaped Vac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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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a God-shaped vacuum in the heart of every man which cannot be filled by any created thing, but only by God, the Creator, made known through Jesus.

인간의 마음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한 빈 공간(God-shaped vacuum)이 존재한다.

-Blaise Pascal, Pensees –

Contac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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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개봉했던 Contact 이라는 영화를 오늘에서야 봤다. 15년 이상 지난 영화이지만 오늘날 더욱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많은 것을 시사하는 영화다.

몇가지 포인트:

1. 고통의 문제
고통은 민감한 문제다. 예나 지금이나 고통의 문제만큼 인간의 영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제는 없을 것이다. 주인공 엘리로 등장하는 조디 포스터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심근경색으로 잃게된다.  그녀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를 위로해주기 위하여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거네며 다가온 한 성직자에게 던지는 그녀의 회의적인 말투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반영한 것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아픔이 그녀에게 무신론적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무신론자들이 National Academy of Science의 멤버의 95% 이상이 무신론자이니 하는 통계를 들이대며 과학적 이해와 통찰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필연적으로 무신론적 세계관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논증을 하곤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연구를 보면, 자신을 무신론자로 분류하는 이런 탁월한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과학적 연구로 인해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미 견고한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들의 과학적 연구에 뛰어드는 것이라고 한다.

2. 과학과 초자연적인 경험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지침중에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이라는 것이 있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더 간단명료한 쪽을 선택해야한다는 것이 오컴의 면도날의 원리이다. 즉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신론자이자 탁월한 과학자로 나오는 엘리는 이 영화에서 Occam’s Razor를 들이대며 신이 존재하지만 인류에게 자신의 흔적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설명과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인류가 만들어 냈다는 설명 중 어느 것이 더 간단한 설명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관찰가능한 증거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과학자인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신의 존재를 가르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영상참조).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위해선 (과학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는 엘리에 대한 팔머(Matthew McConaughey) 의 반응이 인상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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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머: Did you love your father? 아버지를 사랑했나요?
엘리: Yes. Very much. 네. 아주 많이요.
팔머: Prove it. 증명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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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머의 전략은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 윌리엄 레인 크레그(William Lane Craig)가 과학만이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순진한 사상을 옹호하는 옥스포드의 화학자 피터 앳킨스 (Peter Atkins)에게 과학이 증명할 수 없는 최소 다섯가지를 제시하며 그를 벙찌게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상참조)

1. Logical and mathematical truths (논리와 수학적 진리)
2. Metaphysical truths (형이상학적 진리)
3. Ethical values (가치에 관한 진술)
4. Aesthetic judgments (미학적인 판단)
5. Science itself (과학 그 자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법정에 앉아 자신이 들이댔던 Occam’s Razor의 논리로 공격받는 상황이 온다. 실재였던 경험들에 대한 그녀의 진술들이 과학적인 증거의 부재로 반박당하게 되고, 그녀가 일종의 일시적인 환상에 빠져있었다는 설명이 더 Occam’s Razor의 원리에 더 충실하기에 더 설득력이 있다는 말까지 나온게된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이 겪은 경험들을 증명할 수 있는 물리적인 증거를 하나도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과 자신의 모든 경험들이 일종의 환각 상태에서 일어났을 가능성, 자신도 다른 누군가가 그런 주장들을 했다면 똑같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내렸을 것이라는 점 등을 모두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이 실재였다는 사실에 조금도 의심이 없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만이 보고 들은 것들과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변론한다 (영상참조)

이 장면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앞에서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전 우주를 주관하시는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나누어 본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공감할만 한 부분이다. 과학은 절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없다. 과학이라는 학문의 탐구 영역은 물리적 법칙 아래있는 자연세계이지만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즉 그 모든 물리적 법칙들을 뛰어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은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에 의존하는 과학적 탐구방법은 성격상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가 던지는 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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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like you are saying science killed God. What if science simply revealed that He never existed in the first place?”

“당신은 과학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말하는 거에요. 만약 과학이 하나님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밝혀낸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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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해낸다는 발상은 사실 과학의 한계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 줄 뿐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만능주의에 빠져 과학이 이런 작업까지도 수행해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3. 도덕적 가치

영화 속에서 엘리는 “Would you consider yourself a spiritual person?” 이라는 질문에 “I consider myself a moral person.”이라는 동문서답을 한다. 이 질문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영혼,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자신은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쌩뚱맞은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상하다.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부재를 전제한다면 엘리는 어떤 기준으로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의 세계관에 의하면 도덕이란 결국 약육강식의 원리 속에서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일련의 사회적 규범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Amazing Grace

영국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이끈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Amazing Grace>> 에서 가슴을 뭉클케 했던 한 장면이 있다. 20여년간 노예선의 선장으로 노예무역에 가담했지만 회심한 후 그 유명한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 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존 뉴턴 (John Newton)의 고백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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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자+무신론자들에게 던지는 핵폭탄: 진화론과 무신론은 합리적으로 양립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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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이야기 하자면, 이 글에서 소개할 알빈 플란팅가 (Alvin Plantinga) 교수의 주장은 “진화론과 자연주의(Naturalism)는 양립 불가능하다” 이다. 자연주의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들을 위해 일단 “무신론” 이라는 더 보편적인 단어로 낚았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계속 살펴보겠지만 오늘날 무신론 = 자연주의 이라는 공식이 어느 정도는 성립한다고 보기 때문에 아주 몹쓸 사기를 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일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존재나 힘의 개입을 거부하는 입장을 일컫는 자연주의는 극단적인 무신론의 한 형태이다. 이론적으로 모든 자연주의자는 무신론자이여야 하지만 모든 무신론자가 자연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는 부정하지만, 플라톤의 ‘선’ 개념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자연주의자는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오늘날 무신론자들은 거의 대부분 자연주의의 옷을 입고 있다. 특히 물질세계는 물질로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유물론적인 전제 아래 이루어지는 과학적 방법론만이 진리를 탐구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식의 주장과 함께 과학이 초자연적인 존재의 부재를 증명한다는 강한 확신에 찬 무신 진영의 과학자들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진화론을 연구하는 생물학, 신경과학 등의 학문 분야의 최전선에 있는 과학자들은 진화론은 이론 이상을 넘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고, 진화론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무신론으로의 귀결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한다.

과연 그런까? 20세기의 아퀴나스로 평가받으며 기독교 철학의 대부로 알려진 노틀담 대학의 알빈 플란팅가 교수가 과학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던 자연주의자들의 놀이터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그는 오히려 자연주의와 진화론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이며 진화론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공격하는 수많은 자연주의자들을 초토화 시켜버림으로써 종교철학사에 한 획을 긋는 큼지막한 업적을 남긴다. Evolutionary Argument Against Naturalism (EAAN) 으로 불리는 이 논증은 찰스 다윈이 자신의 진화론이 빠져있는 모순에 대한 고민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인간의 마음이 가장 하등한 동물에서 발전돼 나온 것이라면 그 마음에서 나온 대단한 결론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 (다윈 자서전, 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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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자들에게 인간은 그저 유물론적인 해석을 통해서만 설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진화론을 수용하는 자연주의자라면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동들을 신경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작용에 대한 결과이며. 이런 신경체계의 작용은 주변환경 등에 적응을 하면서 생존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게 된다고 믿어야 한다.

문제는 자연주의적인 혹은 유물론적인 접근을 취하는 이상 인간의 신념(Belief)도 행동과 똑같이 신경체계의 화학적 작용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해야한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의 참/거짓 여부는 그들의 생존과 연관이 없다. 그렇다면 자연주의와 진화론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인지 능력이 믿을만하다고 할 수 있는 확률이 낮다. 생존이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인간의 신념이 참을 향해 나가는 방향으로 우리의 인지 능력이 진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인간의 인지능력이 신뢰할 만하다는 전제를 포기해야할 충분한 근거가 생긴다. 이 상황까지 오게 되면, 그들은 결정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얻어진 모든 믿음들 또한 신뢰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자연주의와 진화론이 둘 다 참이라는 믿음또한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결국 자연주의와 진화론은 자기반박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므로 이 두가지는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인간은 진화했으므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라는 식의 주장이야말로 결국 지적자살인 것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을 신뢰할 수 없고, 그 신뢰할 수 없는 인지능력을 통해 얻어진 모든 지식과 믿음을들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은 결국 인간을 허무주의의 늪으로 향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적어도 허무주의의 길에 들어선 진화론+자연주의자는 자신의 사상에 있어서 일관성이 있는 것이리라. 플란팅가는 자연주의와 진화론의 충돌을 이렇게 설명한 후에 더 나아가서 유신론과 진화론은 합리적으로 양립 가능함 또한 설명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부분을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플란팅가는 또한 많은 유신론자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합리성을 보이기 위해 신의 존재 증명에 급급해 하고 있을 때, 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합리성이 신의 존재의 증명을 필요로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신의 존재의 증명이 없이도 신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합리적이라는 논증을 펼쳐 역사에 길이 남을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플란팅가의 논증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아래를 참조:

한글 논문

동영상:

英·美에 기독교 르네상스 바람이 불고 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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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존재하는가” 美 크레이그 교수, 英 무신론 학자들과 신학 논쟁

몇 년 전부터 서양에서는 기독교 유신론 철학과 변증의 르네상스적 흐름이 왕성하다. 우리나라에서 번지고 있는 반기독교 운동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다. 미국 탈봇신학대학원 윌리엄 L 크레이그 교수가 지난달 17일부터 26일까지 열흘간 케임브리지대와 옥스퍼드대를 방문해 활동한 영국 신앙투어도 그 한 예다. 크레이그 교수는 ‘합리적 신앙 투어(The Reasonable Faith Tour)’로 이름을 붙인 이번 방문에서 영국 학문의 심장인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를 주제로 영국 석학들과 세 차례의 토론과 네 차례의 공개강연을 진행했다. 논쟁에서 어떤 무신론 학자도 크레이그 교수의 유신론적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이 논쟁 직후 학계에서는 “이번 논쟁은 기독교 신앙이 상당한 지성적 토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며 “영미권에서 기독교 철학과 변증이 활발하게 꽃피고 있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번 투어가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세계 무신론 운동의 대표 격인 옥스퍼드대 석좌교수 리처드 도킨스와의 논쟁 성사 여부였다. 도킨스와 크레이그 교수는 2010년 멕시코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패널 토의자로 만나 짧게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펼쳐질 본격적인 신학 논쟁이 오래 전부터 세계 학계의 커다란 관심사였다. 영국 인문주의연합(TBHA)의 폴리 토인비 회장과의 토론도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도킨스 교수와 토인비 회장은 거듭된 주최측(UCCF)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불참 이유는 크레이그 교수가 철학자로 유명하지 못하다는 것과 바쁘다는 것 등이었다. 도킨스 교수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현존하는 최고의 반기독교 생물학자. 저술활동뿐 아니라 강연, 단체활동 등을 통해 급진적인 무신론 운동을 펼치고 있다.

크레이그 교수는 변증학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로 30권 이상의 철학 관련 서적과 유명 철학 학술지에 200편 이상의 연구논문을 게재한 석학이다. 한국에도 출판된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의 저자인 미국의 유명 비평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와의 논쟁에서 완승을 거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2009년 히친스와의 논쟁 직후 무신론 진영으로부터 “히친스는 두서가 없었고 앞뒤가 맞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히친스를 마치 어리석은 아이처럼 쉽게 다뤘다”는 평가를 얻었다. 무엇보다도 영국 최고의 자존심을 자랑하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그를 초청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명성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도킨스 교수가 ‘철학자로 유명하지 못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수차례의 요청을 거절하자 옥스퍼드대 철학교수이자 무신론자인 다니엘 캐임 박사는 도킨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논쟁에 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캐임 박사의 편지는 “충분한 학문성을 갖춘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와의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도킨스는 겁쟁이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신의 책 ‘만들어진 신’에 대해 토론하자고 하는데도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비웃음거리이자 반지성적인 처사”라는 내용이다.

토론이 위기에 놓이자 크레이그는 도킨스와 토론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계속 밝혔음에도 논쟁은 끝내 무산됐다. 그러자 영국 무신론자 진영에서조차 실망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지난달 22일자 가디언과 크리스천 포스트에서는 ‘도킨스의 논쟁 불참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비판적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크레이그 교수의 신학 토론은 17일 영국 철학저널 ‘Think’의 편집인 스티븐 로, 21일 옥스퍼드대 철학교수 피터 밀리칸, 26일 옥스퍼드대 전 화학교수 피터 애트킨스와 진행됐다.

영미권에서 이처럼 기독교 철학과 변증이 붐을 이루는 것은 2000년 이후부터다. 종전부터 진행돼온 학계의 신학 논쟁에서 유신론자들의 승리가 계속되자 미국의 무신론 철학자 쿠엔틴 스미스는 철학지 ‘필로(Philo)’ 2001년 가을·겨울판에서 “현재 미국 대학 철학과 교수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은 유신론자”라며 “학문세계에서 하나님은 1960년대 후반에 되살아나 현재는 학문적 요새인 철학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글을 발표했다.

탈봇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변증학을 전공한 박명룡 큰나무교회(서울 방화동) 목사는 “미국 학계의 유·무신론 논쟁에서 무신론 학자들이 승리를 거둔 사례는 아직 없다”며 “미국에서 ‘예수는 없다’는 유의 기이한 주장은 오래 전부터 발붙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반기독교적 입장을 취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지식에 근거한 지성적 신앙을 가르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한 개인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견고한 지성적 확신을 갖게 된다면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에 온전히 헌신하게 된다”고 했다.

펌: 기사 원본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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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주기철목사 옥중 기도문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길 바랍니다.어떤 이는 나에게 왜 괜한 일로 목숨을 거느냐고 말합니다.또 다른이는 가족 생각은 않고 자기 의지만을 주장한다고 말합니다.또한 친구는 이제 적절히 타협하고 먼 훗날을 기약해서 한걸음 물러서자고 합니다.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체 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 7~8).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의 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수제자 베르도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모른다고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열백 번 죽음은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죽이신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리이다.

둘째,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주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형벌을 면하고 도리어 상을 준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 십자가! 오직 내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 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셋째,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내게는 팔십을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의무도 귀중하고 가장, 아비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시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 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 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꼬!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달빛이 철장에 새어들 때, 어머님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봉양한다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한 주님께 나도 내 어머님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도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양떼를 두고 가는 이 내 마음 차마 못할 일이오나,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님께서 지켜 주실 줄을 믿사옵나이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우상 때문에 정절을 잃어버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 피할 수가 있사오리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에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아무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에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아멘.